다시 태어나면, 다시 태어나면.

결핍에서 회복으로, 회복에서 연결로

by 다나




그 아이가 내게 위협적이지 않았던 이유는 너무나 작기 때문이였다. 여자인 내가 한 손으로 들어 올려서 구석에 내려놓을 수 있을 만큼 보잘것없는 몸이였다. 숨을 한번 불어넣으면 공기로 흩어질 것 같은 가벼움이 아이의 뒷모습에 있었다.


그러나 그 쬐그만 몸에서 터져 나오는 악 소리는 늘 복지실을 메웠다. 목에서 어깨로 이어진 핏줄이 분노로 맹렬히 부풀어 올랐다. 그 아이를 바라볼 때마다 난 안쓰러움과 성가심 사이에서 흔들렸다. 커다란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지만 활동에도 잘 참여하지 않는 아이. 참으로 불편했다.하지만 놓을 수 없는 책임이 내 앞에 있었다.


다른 아이들이 다 집으로 간 뒤에도 지수는 내 곁을 맴돈다. 덩그러니 혼자 남아 종이접기를 하고있었나.난 말을 건네야 할지 망설였다. 괜히 건드렸다가 퇴근 시간을 앞두고 또 다시 악을 쓰고 울부짖을까 겁이 났다. 그렇다고 이 작게 굽은 등을 가만히 두고 볼 수도 없었다. 잠시 숨을 고르고 조심스레 톡톡 말을 걸어본다.어쩌면 그것이 그날 하루 내가 낸 가장 소소하고도 큰 용기였는지도 모른다.


"지수야 넌 지금 뭐가 제일 하고싶니?"


"네? 그냥 죽고 싶어요. 다시 태어나면 좋겠어요."


9살 아이의 입에서 태연히 나온 이 무거운 말에 숨이 막혔다. 하아..이 나이에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지 않은가. 듣는것만으로도 죄책감에 사로잡혔고 오늘 퇴근은 끝났다는 느낌이 들었다.


"뭘 그렇게 처음부터 다시하고 싶어?"


그냥 전부 다.


게임처럼 다시 시작할래요

지수의 부모님은 오래 전부터 곁에 없었다. 기관을 여러군데로 전전하다 보니 아이는 부모의 얼굴조차 생각나지 않는다 했다. 누군가 슬쩍 전해준 말로는 어머니는 쉼터에서 지내고 있고 아버지도 길 위에 있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그냥 전부 다 시작하고 싶다는 지수의 말이 단순한 투정으로 들리지 않았다.


우린 아이들이 겪는 이런 증상을 리셋 증후군이라고 부른다. 컴퓨터 전원을 꺼버리 듯 지금의 삶을 멈추면 곧장 새로운 삶이 시작될 거라는 상상이다.


아직 죽음을 완전한 소멸로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서 자주 나타나는 상상이다. 지수의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말에는 생을 끝내겠다는 충동이 춤추기보다도 새롭게 잘 살아보고 싶다는 욕망이 더 강하게 섞여 있었다.


몇 주를 고민했다. 지수의 갈망이 허공에 흩어지지 않도록 붙잡아 줄 매개가 필요했다. 다시 태어나지 않아도 잘 살 수 있다는 모델이 되어줄 누군가. 부모가 없이 어른이 될 아이를 세상과 연결해줄 존재가 필요했다.


그때 떠오른 사람이 있었다. 지수의 심리치료비를 후원하던 교회의 한 청년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자랐지만 훤칠했으며, 명문대를 나와 대기업에 다니는 소위 엘리트였다. 나는 그에게 지수 이야기를 전했고 미안하지만 만나 달라고 부탁했다.


그 둘이 만나기로 한 그날은 하필이면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렸다. 아이가 신은 샌들은 금세 물에 젖었고 빗물에 쓸려 끊어져 버렸다. 걸을때마다 밑창이 쩍쩍 갈라지는 소리 때문에 제대로 디딜 수조차 없던 아이는 번화가 한복판에서 우두커니 멈춰 섰다. 영화관에서 트렌스포머를 보려고 했던 날이었지만 우리는 영화를 보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같이 서 있었다.


청년은 잠시 망설이다가 아이를 번쩍 안아 자신의 등에 올려놓았다. 그는 말없이 걸었다. 아이도 말이 없이 잠잠히 매달려 있었다. 소음이 가득한 도심을 지나 아이의 거주지인 외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빗줄기가 등에 내리꽂히다 그쳤다. 하지만 집까지 길은 한참이나 길었다. 신발은 진흙에 파묻혀 무겁게 달라붙었다.


아이를 시설에 내려놓고 돌아서던 순간 청년은 입술을 깨물었다.
“샘, 제가 못할 짓 한 것 같아요. 너무 작은 아이를 거기에 두고 나오는 게 마치 내가 버리고 오는 것처럼 가슴이 아팠어요. 정말 미안한데요.. 다시 안 만나고 싶어요.”

그러나 안만나겠다는 말과 달리 그는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곁에 서기로 했다. 메신저로 말을 건네고, 책을 보내주고, 진로를 고민할 때마다 응원했다. 결국 트랜스포머도 함께 보았다.



마카롱으로 전하는 마음

어느날 학교에서 방과후 시간에 마카롱을 만들었다며 쪼그만 하트가 한가득 박힌 비닐에 담아와 내앞에 툭 내려놓고 말없이 나갔다. 쪽지안에는 "보고싶어요. 저도 OO샘 처럼 공부 열심히 할께요. 감사합니다" 라고 적혀 있었다.


그렇다. 마카롱은 내것이 아니였다.

청년 후원자에게 보내는 아이는 마음이었다. 아이를 지탱하는 것은 거대한 제도도 넘치게 주는 사랑도 복잡한 후원계획도 아니었다. 소소한 안부와 묘한 동질감 속에서 지수는 다시 태어남을 꿈꾸지 않고 지금 이 자리에서 잘 살아가려 애쓰기 시작했다.


혹자는 지수의 이후 행방을 궁금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이야기를 멈추려 한다. 중요한 것은 아이가 어떻게 되었는가가 아니라 지수와 같이 길을 헤매는 아이들 곁에 누가 있었는가이다. 청년 후원자는 시간이 흘러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며 종종 그 시절을 회상한다고 한다. 첫 만남에 내가 찍어준 사진을 아이에게 보여주며 웃곤 한다.


“현모야, 아빠 등에 업혀 있는 게 전도사님이야. 너처럼 이렇게 어렸었어.”


삶은 다시 태어남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등을 내어주는 작은 연결에서 이어진다. 우리가 내어준 한 번의 등은 누군가의 내일을 지탱하는 삶이 된다.


지수와 같은 아이들이 청년이 되고 사회 속에서 어른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그 곁에 누군가의 연결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아이의 연결은 단지 개인을 살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사회를 이어주는 보이지 않는 연결이 된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그 다리가 되어 줄 수 있다면 더 많은 아이들의 삶이 오늘도 이어질 것이다.








어른인 우리에게 남는 질문

결핍을 겪는 아이가 다시 태어나길 바라며 삶의 끝을 상상하기 전에, 지금 이 순간 손을 내밀어줄 어른이 더 필요합니다.


혹시 당신이 그런 어른이 되어 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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