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잘데기 없는 것들의 힘

쓸데없는 랍스타는 너무 사치스러워.

by 다나



“샘, 랍스터 먹으면 행복해져요? 티비에선 다 그렇게 보이던데!”

아이들의 질문은 참 직설적이고도 해맑다. 나 역시 그 말을 듣자마자 반사적으로 한 장면이 올라왔다. 특별한 날 가족들이, 연인들이 환히 웃으며 랍스터를 나누는 장면이였다. 미디어의 힘이란!


“랍스터가 꽃게랑 같은건가?” 은진이는 고개를 갸웃했고, 또 다른 아이는 “난 게도 못 먹어봤는데”라며 중얼거렸다. 어느새 교실 안은 랍스터 토론장이 되어 있었다. 여섯명의 아이들 중에서 실제로 먹어본 친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쓰잘데기 없는 욕망들

“야! 데이트하러가면 랍스터 먹는거야”
“가족끼리 외식할 때 먹는 거야. 엄마 아빠 있으면 나도 먹었을 텐데.”
“샘, 우리도 랍스터 먹으러가요?!”

농담처럼 던진 말들이었지만 우린 잠시 멈췄다. 이 친구들에게 엄마아빠의 이야기는 무거운 주제기 때문이다. 나는 식문화 체험을 핑계 삼아 매식을 추진해볼까 고민했지만, 메뉴판을 찾아 보는 순간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랍스터는 공공의 손길로 닿기 어려운 가격대였다.


공공이 안되면 개인후원자를 찾아보자는 마음에 지인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평소 후원해주던 지인 중 몇몇은 고개를 저었다.

“먹고 사라지는 랍스터나 쓰잘데기 없는 장난감보단, 생활비로 보태주는 게 좀 낫지 않니?”
“에이, 차라리 저금해주면 미래에 더 도움 되지.”

충분히 현실적인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늘 믿는다. 아이들은 원래 쓰잘데기 없는 것들 속에서 정서를 키운다고.


심리학자 위니컷(D. W. Winnicott)은 낡은 천조각 같은 전이대상이 기능적으로는 무가치해 보이지만 아이들에겐 세상과 연결되는 안전한 기지가 된다고 말했다. 랍스터 한 끼? 그렇다, 몇 달 뒤 기억에서 사라질 수 있다. 그러나 그날의 반짝임은 마음속에 조각으로 분명히 남는다. 부모가 있는 아이들은 쉽게 누릴 수 있는 경험이지만 부모가 없는 아이들에겐 평생의 꿈처럼 멀리 있는 것. 그 불균형이 나를 더 속상하게 했다. 아이들은 원래 쓰잘데기 없는 것들 속에서 정서를 키우는데 이 친구들에겐 쓸데없는거에 선뜻 큰돈을 지불해 줄 부모가 없었다.



대게 vs 랍스터

주말을 앞두고 뜻밖의 후원자가 연락이왔다. 나는 도매상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상인은 대게를 권했다


“살점은 대게가 훨씬 많아. 랍스터는 크기만 크고 무게만 많이 나가지 먹을게 하나도 없어요. 지금 제철이고 맛있는걸로 사가요"


그 말에도 나는 랍스터를 포기할 수 없었다. 직접 경험한 뒤에 "야 그거 먹을거 없더라" 말하는 것과, 경험조차 없이 “별거 아니래”라 단정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걸. 전자는 선택이지만, 후자는 결핍이 만든 자기방어가 될 수 있다. 결국 난 랍스터와 대게를 함께 사 기관으로 향했다.


찜통뚜껑을 여는 순간 거실은 난장판이 되었다. “와아!” 하는 환호와 동시에 “으악! 징그러워!”라며 도망가는 여자아이들의 비명소리.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기겁하고, 잠시 그곳은 해산물 버라이어티쇼가 따로 없었지.


처음 본 랍스터는 아이들의 상상보다 컸지만 정작 살은 많지 않았다. 현우가 “생각보다 먹을 게 별로 없네”라며 웃었고, 같이 생활하는 중학생 형이 “랍스터는 나도 못 먹어봤다, 너희는 이걸 꼭 먹어야 했냐”라며 농담을 가장한 퉁을 건냈다. 이내 아이들은 작은 살점 하나에도 눈을 반짝이며 꺄르르 거리며 공간을 채웠다. 그 순간 랍스터는 살점이 아니라 존재의 증명 같았다.


보통 이러한 경험을 대체적 보상 경험이라 부른다. 이는 결핍된 환경에서 얻은 특별한 소비 경험을 통해 순간적 즐거움 이상의 심리적 자원을 축적하는 것이다. 단순히 새로운 음식을 먹었다는 사실이 아니다. 아이들은 가족이 있으면 가능했을 자리에 자신도 함께할 수 있다는 감각을 원했다. 이는 미각의 추구라기보다도 사회적 인정의 경험으로 내게는 읽혀졌다. 타인의 눈으로 보았을 때 자신도 충분히 어울릴 수 있다는 확신, 그것이 아이들에게는 무엇보다 절실했다.



부모라면 이미 아는 일

아이들은 껍질을 부수며 까며 웃었다. 누군가에겐 별거아닌 저녁 메뉴가 다른곳에선 일생일대의 축제가 될 수 있다. 사치란 결국 사회가 붙여놓은 라벨일 뿐이다. 랍스터 한 번 먹는다고 아이들의 삶이 바뀌진 않겠지. 그러나 그 경험이 다음 꿈으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이미 삶을 끌고가는 동력이 되준다.


며칠 뒤 아이들은 농담처럼 말했다.

“선생님, 다음엔 참치초밥이요!”
“저는 쌤이랑 에펠탑보러 파리에 갈래요!”

나는 그저 웃었다. 그들의 바람이 단순한 미식 취향이 아니라 나도 부족하지 않은 존재라는 감각을 맛본 증거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랍스터는 단지 그 걸 열어준 매개였을 뿐이다. 사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은 이미 알고있다. 아이들이 얼마나 쓸데없는것에 돈을 쓰게 하는지 말이다. 하지만 기억도 못 할 세 살 아이를 데리고 여행을 가면서 부질없다 말하지 않는다. 아이 기억에 남지 않아도 그 순간의 기쁜 정서가 부모와 아이 모두의 마음에 흔적을 남기고 지나가는걸 알기 때문이다.


모가 없는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다만 그 쓸데없음을 기꺼이 해줄 사람이 없을 뿐이다. 그렇다면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어려운 삶을 헤치고 가는 아이들에게 쓸데없음이라는 한 번의 사치같은 특별한 시간을 제공해주는것이다. 그것이 삶을 지탱하는 온기로 남을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


그렇다면 이 다음은 뭘까?
아이들이 말한 대로 참치초밥일까, 뮤지컬일까, 아니면 언젠가 에펠탑을 보러 가는 걸까.
뭐든 좋다. 중요한 건 아이들의 마음에 남을 또 한 번의 ‘쓸데없음’을 함께 만들어주는 일이니까.









어른인 우리에게 남는 질문

어린 시절, 쓸데없지만 행복했던 순간은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나요?

지금 당신이 떠올리는 그 장면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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