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이 만드는 빛
보호받지 못한 아이들은 언제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곁에 있어야 할 어른들은 늘 자주 부재했습니다.
어른의 부재란 제도의 부족함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아이들을 향한 책임과 공감의 결여를 의미했습니다.
15년 동안 복지 현장에서 수많은 아이들의 존재를 확인했지만 그 곁을 끝내 지켜주는 어른의 존재는 늘 부족했습니다.
아마도 저 역시 그 부족함의 일부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불행을 전하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등장하는 아이들의 결말을 모두 담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 입니다. 사건을 전달하기보다는 그 사건을 둘러싼 사람들의 속도를 기록하고 싶었습니다. 제도보다 빨랐던 절망과 서류보다 먼저 무너졌던 얼굴들. 그 뒤에서 남아 있던 아이들의 모습을 남기고자 했습니다. 복지의 언어로는 설명되지 않는 감정, 그 감정 속에야말로 사회가 외면해 온 진짜 결핍이 숨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도움을 주지 못한 아이들의 이름이 떠올랐습니다.
반지하가 아파트보다 좋다고 말하며 어른이 되면 배달일을 하며 마음껏 꿈을 펼치겠다던 아이.
할머니를 도와주겠다며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하고 싶다고 말하던 아이.
그들의 치기 어린 다짐은 현실의 언어였고
그 이상을 상상할 여유조차 허락받지 못한 꿈이었습니다.
그 아이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요.
그 물음들이 때때마다 돌아왔고 그때마다 글을 쓰며 제 무력함을 다시 마주했습니다.
하지만 이 글들은 그 아이들을 잊지 않게 만드는 제 방식이기도 했습니다.
복지사는 사회의 구조를 설명해야 하지만 작가는 그 안의 마음을 써야 합니다.
저는 이 책에서 그 두 역할을 함께 감당하고 싶었습니다. 문학은 복지처럼 즉각적인 개입은 할 수 없지만,
복지가 닿지 못한 곳까지 닿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었습니다.
많은 사회적 에세이가 피해자의 고통을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복지가 닿지 못한 보호 실패의 구조를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아이들의 이야기이자 그 곁에서 손을 놓은 어른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나 자신의 이야기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책은 고발이 아니라 성찰의 언어입니다.
좋은 어른이 된다는 일.
그 질문을 나부터 스스로에게 묻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의 질문을 남깁니다.
무력한 아이의 절망 앞에서 우리는 여전히 좋은 어른이라 할 수 있을까?
이 문장을 독자 한 명이 자기 자리에서 되새긴다면 그것이 제가 바라는 변화의 시작입니다.
저는 고발이나 위로보다 질문을 남기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이 언젠가 누군가의 행동으로 이어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