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의도는 왜 아이를 다치게 했는가
흔히 드라마를 허구의 이야기로 우린 인지한다.
그렇다면 드라마 밖의 현실은 실제여야 하는게 맞지.
하지만 우리가 현실을 이해하는 방식 역시 종종 드라마적이다.
현장 슈퍼바이저가 어느 날 내게 말했다.
보통의 사람은 엄마가 한 명이지만, 우리가 만나는 아이들에겐 엄마가 두 명이 있어.
그리고 아이들을 둘러보니 정말 그랬다.
아이들에게 엄마는 한 사람일 수밖에 없는데, 그들의 기억 속에서 엄마는 둘 혹은 그 이상이었다.
의도치 않게 버려졌고 가족을 잃어버 아이들은 종종 말했다.
“우리 엄마 얼굴은 두 개였어요.”
이 단순한 이분법이 아이들의 관계 구조를 얼마나 깊게 규정하는지를 현장에서 수 없이 목격한다.
한쪽은 나를 학대하고 방치한 나쁜 얼굴을 한 엄마.
다른 한쪽은 그 엄마 대신 나를 돌봐준 누나나 이모 같은 좋은 엄마였다.
어릴 때부터 반복된 이 극단 속에서 아이는 제3의 지대를 만들지 못한다.
이분법의 드라마는 그렇게 현실에서도 고스란히 재연된다.
아이 곁에 개입하는 어른들도 이 환상 구조에 끌려 들어간다. 아이에게 진심으로 다가가고 싶기에 나쁜 엄마 자리는 맡을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좋은 엄마 혹은 구원자 역할을 자처하게 된다. 그러나 그 순간 어른들는 본래의 위치를 잃게되며 아이가 만든 내적 드라마의 등장인물이 된다.
처음에는 애틋함이 터져 나온다. 하지만 곧 피로가 찾아온다. 피로감으로 떠난 어른은 또 하나의 날 버린 사람이 된다. 이렇게 아이의 세계관은 강화된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구원은 잠시뿐이다. 모든 관계는 결국 떠난다.'
돕고자 하는 아이와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운더리다.
아이와 관계를 맺을 때는 정해진 시간과 공간, 역할과 규칙이 필요하다. 그러나 안정된 관계 경험이 없는 아이는 이런 바운더리를 상당히 낯설어한다. 그들은 좋은 것이 왔을 때 지금 다 가져야 한다는 강한 충동을 느낀다
과거에 좋았던 것들이 늘 너무 빨리 끝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받는 순간에 감정과 요구를 쏟아낸다. 그 요구는 때로 상대가 감당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드러난다. 죄책감보다 생존의 욕구가 앞서기 때문이다.
나는 후원자나 멘토를 연결할 때 늘 이렇게 말한다.
아이에게 선을 긋는 것은 거절이 아니예요.
끈질기게 달라붙는 요구에 무조건 응답하는 것은 도움이 아니다. 경계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관계를 오래 지속시키는 힘이다. 왜냐하면 많은 아이들이 양육자로부터 일관되지 않은 자극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보살핌과 무관심, 폭력과 방임이 반복되는 예측 할 수 없는 가정 속에서 자랐다. 그 경험은 안정적 신뢰를 어렵게 만들뿐더러 강한 자극과 불안정한 관계에만 반응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도움을 주려는 사람은 헌신적으로 감정을 소진하는 존재가 아니라, 감정을 소모하지 않고도 곁을 지킬 수 있는 예측 가능한 어른이어야 한다. 이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한순간의 구원이 아니라 시간을 견디는 관계다. 그리고 그 관계는 경계에서 시작된다.
바운더리는 단절이 아니다. 오히려 관계를 안전하게 지키는 최소한의 장치다. 아이에게 가족의 빈자리를 메워주는 주인공이 될 필요는 없다. 그들이 더 오래, 더 조용히, 더 안전하게 누군가를 믿어도 된다는 경험이 더 중요하다.
내가 이 구조를 이토록 또렷이 아는 이유는, 나 역시 그 아이들을 구하려다 자신을 잃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상처만 남긴 채 떠났던 또 다른 어른이 항상 나였다.
초등 6년을 치열하게 함께한 끝에, 연희가 마지막에 나를 찾아왔다.
그 아이는 내 이름을 또렷이 기억해 불렀다.
연희에게 나는 좋은 엄마도, 나쁜 엄마도 아니었다.
다만 자신이 잘 아는 어른으로 곁에 있어준 사람으로 남았던 것 같다.
먼저 말을 건 적 없던 그 아이가 그날 내게 건넨 첫마디는 이랬다.
“선생님, 저 그림 그릴 붓이 필요한데요.”
나는 마치 직접 깎아 만들어줄 수 있을 것처럼 마음이 뛰었다.
내 표정을 본 그 아이의 입꼬리에 피식 웃음이 번졌다.
그 웃음을 나는 또 한 번 보고 싶었다.
한 번 더 보고 싶은 웃음.
한 번 더 만들고 싶은 순간.
그래서 알면서도 다시 뛰어드는 이 무모한 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