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게 문자만 오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머리가 지끈거리면서 숨쉬기도 힘든 패닉상태가 된다. 여전히, 아직도 그렇다. 내가 일방적으로 마무리시킨 지난 대화(대화라 했지만 실상 주고받은 장문의 문자들)만으로도 그간의 받은 상처가 또다시 반복된다. 더 이상 호소도 이해도 시키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하지만 진정시킨 마음이 채 가시기도 전에 어떻게든 손주들을 보겠다는 그 의지 때문인지 이제는 나에게 매달리고 부탁하고 우울증에 불면증 카드까지 꺼내들며 심리적 압박을 가하고 있다. 문자 내용만 보면 이렇게 절절할 수가 없다. 아이들이 너무 보고 싶은 마음에 살맛이 안 나고 우울하고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누가 보면 내가 제 자식을 강제로 떼어놓고 보지 못하게 하는 사람인 것 같다.
게다가 뜬금없이 자신이 오후에 시간이 많으니 복직을 하라는 등 아이들 케어를 맡기라는 등 바라지도 않은 선의를 베푼다. 하지만 나는 또렷이 기억한다. 작년 11월 엄마를 앉혀놓고 내 딴에는 조심스럽게 눈치 아닌 눈치를 보며 말했었다. "엄마.. 나 이제 돈 벌어야 될 거 같아.." 내가 기대한 건 마지못해 내 부탁에 응하는 엄마일지라도 아이들 육아에 얼마나 돈을 드려야 되나 고민이 추가된, 답이 나름 정해진 얘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내 말이 끝나자마자 돌아온 대답은 너무 직설적이라 할 말을 잃었다. "야. 나도 돈 벌어야 돼.." 어떤 리액션이나 감탄사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날의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그러던 엄마가 부탁하지도 않았던 일에 손을 먼저 내민다. 엄마는 그 이후로 아파트 청소일을 한다. 그것도 내가 사는 아파트의 다른 단지에서 일을 한다. 그곳은 내 큰 딸의 친구들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이고 난 딸 친구들 엄마들과 친구이다. 내 부탁의 거절에 대한 서운함은 고사하고 엄마가 선택한 직장의 위치마저 나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었다. 딸의 친구 엄마들에게는 소일거리로 엄마가 거기서 일한다고 둘러댔다. 어떻게 생각할지는 그들의 몫이겠으나 엄마가 일을 하는 이유를 아는 나는 심히 당혹스럽고 괘씸했다.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돈으로 인해 엄마의 민낯과 밑바닥을 마주한 이후로 동생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동생과 나는 엄마가 부동산에 투자한 시기를 그때쯤으로 본다. 동생과 내가 사회초년생 이었던 근 15년도 더 된 그때말이다.
동생은 대학을 가지 않았다. 갈 이유를 찾을 수 없어서 가지 않았다고 말해왔지만 그건 부모의 가스라이팅일 뿐이었다. 공부에 흥미가 없는 자식은 그저 성인이 되면 돈벌이를 해야 한다는 게 엄마의 지론이었다. 공부 말고 관심분야가 많았던 동생은 고3 때 직업체험으로 요리를 배웠는데 그때 들어간 돈이 1백만원 정도 됐나 보다. 가난하던 내 엄마는 그 정도의 지원을 큰 투자라 생각했고, 자기랑 맞지 않는 진로라 생각하는 동생을 그저 돈만 축낸 자식이라 여기고 대학 보낼 생각은 하지 않은 채 본인이 다니던 유통업계에 밀어 넣었다.
20살이 된 동생은 부천역 이마트에서 일했다. 물건을 채워놓고 또 팔리면 비워진 매대에 다시 채워놓고 소위 까대기라는 작업을 했다. 나도 그 작업을 안다. 성인이 된 후에 대학에 다니는 나는 명절시즌과 방학에 홈플러스 또는 이마트에서 선물세트 판매 행사아가씨 혹은 동생이 했던 까대기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물론 모든 아르바이트 자리는 엄마가 주선했었다. 그렇게 등록금을 벌고 내 용돈을 벌었었다.
내가 동생보다도 늦게 해 봤던 이 직업은 내 나이 때에도 나보다 어린 사람을 찾기 어려웠었다. 찔끔찔끔 눈치 봐가며 행동했고 어디 기대거나 말 붙일 사람도 없어서 출근하는 게 하루하루 고역이었다. 내가 몇 주짜리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느낀 소외되고 힘든 마음은 길어야 한 달 짜리였기에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거 같다. 물론 다음 방학 때 다시 반복해야 하는 일인 건 변함이 없었다.
짧은 시간에 느낀 고역함, 불편함을 동생은 갓 스무 살 나이에 억지로 일하며 꾸역꾸역 참아가며 버텼다. 문제는 그 당시 월급이 80만 원이었는데 그 돈을 엄마가 모조리 가져간다는 것이었다. 당시에 나는 공무원 시험공부를 하느라 집에 있지않았다.
기억나는 건 동생의 월급날마다 엄마와 동생의 반복되는 실랑이가 지겹도록 있었다는 것이다. 난 엄마가 동생 월급을 어느 정도 요구했고 동생은 그게 싫어 매번 같은 싸움을 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은 놀랍다 못해 충격적이었다. 당시 동생의 월급은 80만원었는데 그 돈을 모조리 엄마가 다 가져가고 가져간 뒤 말미엔 꼭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20만 원 보태서 월 100만 원씩 적금 넣어줄 거야. 다 너 돈 모아 주려 한 거고, 너 결혼할 때 다 돌려줄 거야라고.. 동생은 교통비와 식비만 받았다고 했다. 그 후에 월급이 올라 100만 원이 되었을 땐 가차없이 모조리 가져갔다고 했다. 동생은 그 후로 직업을 바꿔서도 적어도 60만 원씩 월급을 보냈다고 했다.
동생은 9년 후 결혼을 했고 부모에게 받은 돈은 1원 한 푼도 없었다. 그래서 동생과 나는 엄마의 부동산 투자가 그때부터였다고 생각한다. 혹은 내가 직장을 다니고 1년간 월 100만 원씩 엄마에게 주었으니 늦어도 이때쯤이 아니었을까도 싶다. 엄마는 두 딸에게 매달 180~200만 원 정도를 받아간 거다.
하지만 본인이 가장 사랑하고 의지한다던 큰 딸인 나의 결혼조차 받은 돈은 300만 원에 불과했다.돈의 액수보다 그 돈을 건넬 때 엄마의 말은 여전히 상처다. " 너 준다고 보험 대출까지 받았다."라며 마지못해 돈 봉투를 내밀던 엄마의 모습.. 12년 전인데도 지워지지 않는다.
여기서부터 인 거 같다. 엄마의 대한 혼란스러움이시작된 것이.. 나는 그때부터 마음의 병을 앓았던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