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동생에게 연락이 왔다. 지난밤 조카아이가 경기로 응급실에 갔다가 회복되어 돌아왔다고. 조카가 9살이던 해였다. 발달장애가 있는 조카는 자폐가 있었고 합병증으로 뇌전증을 앓고 있다. 얼마 전부터 뇌전증, 즉 간질 증상으로 자다가 기도가 막혀 숨을 쉬지 못해 새벽에 동생이 인공호흡으로 살려낸 적이 몇 번 있었다. 이번에도 같은 상황이 반복된 것이다.
그럴 때마다 엄마랑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안타까워할 뿐이었고 엄마는 자신이 전생에 죄가 많아 아픈 아이가 태어났나 하는 넋두리를 하곤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나중에 동생의 말을 빌리자면 엄마가 전화상으로 하는 위로는 옆집 아줌마도 그 정도는 할 수 있다는 거였다. 엄마는 타국에서 높은 월세와 아이 치료비, 무엇보다 아픈 아이를 키우는 절망감 속에 허덕이는 동생의 처지를 알면서도 그저 입으로만 걱정을 했다.
아빠는 조카가 자라는 동안 관심 한 번 가진 적 없다가 가끔 뜬금없이 조카의 발달 상황을 나에게 물어보곤 했었다. 걔는 언제쯤 걷는다냐, 아직 기저귀를 차고 다니느냐며 관심인지 근황인지 모를 감정이 하나도 안 섞인 질문을 하곤 했었다. 그래서 둘째 딸이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얼마나 아파하는지 추가된 반응은 없었고 그냥 더디게 자라나는 손녀를 답답하게 여겼다. 그런 조카는 5세가 되어 조금씩 걷기 시작했고 10세인 지금 외출 시 기저귀를 차고 다닌다. 아직 말을 하지 못해 손짓과 눈짓으로 의사소통을 한다.
나는 그때 엄마가 동생 걱정에 가슴 아파한다고 여겼었다. 동생의 안 좋은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몸도 약하고 매번 죽을 고비를 넘기는 아이를 평생 키우는 것보다 차라리 아이가 일찍 가버리는 게 동생에게 더 나을 수도 있다는 얘기도 했었다. 동생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없던 나였어도 그런 소리는 할 얘기가 못된다면서 입에 담지도 말라고 했었다.
아무튼 내 눈엔 엄마에게 동생의 안 좋은 소식이 들어가 봤자 좋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동생에게 연락이 온 그날은 아예 엄마에게 동생의 일을 전하지 않았다. 그다음 날 동생에게서 연락이 왔다. 격앙된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어떻게 내 딸아이가 죽었다 살아났다고 했는데, 가족 중 어느 누구 하나도 연락 한 통이 없냐고. 어떻게 가족이란 사람들이 이렇게 할 수가 있냐고.. 어쩌면 이럴 수가 있냐고 울부짖고 통곡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지금 누구를 배려한다고 조카가 삶과 죽음을 오갔던 사실을 나만 알고 그냥 지나쳤을까. 지난날에 동생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이 한꺼번에 몰려와 나 자신이 수치스럽기까지 했다. 언니가 생각이 짧아서 부모에게 말을 전하지 않았다고, 그렇다 할지라도 너에게 연락을 해야 마땅했는데 내가 정말 생각이 짧았다고,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거듭 말했다. 동생은 흐느껴 울 뿐이었다.
나는 진심을 다해 용서를 빌었다. "언니가 첫째 키울 때까지만 해도 자식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지, 네가 얼마나 어렵고 아프게 아이를 키우는지 내가 몰랐어. 근데 쌍둥이를 키워보니까 진짜 힘들더라. 애들이 태어날 때부터 약해서 마음 졸이며 키웠었는데.. 그랬었는데.. 너는 오죽이나 힘들었겠어.. 미안하다.. 언니가 애를 낳아보니 이제야 철이 들어서 정말 미안하다. 미안해.." 착한 동생은 내 얘기를 한참이나 듣고는 이렇게 말했다. "됐어, 이제 괜찮아, 그러니까 미안하다는 말 그만해.." 그날 우리 둘은 부둥켜안은 것처럼 울었다.
동생과 함께 자라면서 동생에게 크게 관심 가져본 적이 없었다. 학창 시절 동생이 엄마한테 구박을 받는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어린 나이부터 아빠의 강압적인 태도로부터 엄마를 감싸주기 바빴기 때문에 매일이 힘든 나에게 동생은 그저 별생각 없이 사는 거처럼 보였다. 하지만 동생은 마냥 어린 철부지도 부모 말을 듣지 않는 말썽쟁이도 아니었다. 그저 또래의 어린아이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사이가 좋지 않은 가족들 사이에서 동생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나 또한 어렸는데 그땐 그냥 내 어깨의 진 짐이 너무 무겁게만 느껴졌다. 그래선 안되지만 자라면서 한 번도 동생 편을 들어준 적도 없는 거 같다. 어린 나이에 부릴 수 있는 사소한 투정도 받아준 적이 없고 언니를 좋아하는 마음을 애써 모른척하며 곁을 내어준 적이 없었다.
왜 나는 아무 잘못이 없는 동생을 한 번도 품어준 적이 없었을까. 나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어른들 틈바구니에서 홀로 눈치싸움을 벌였던 것 같다. 오늘 아빠의 심기는 어떤지, 친할머니는 어떤 꼬투리를 잡을지, 혹시나 엄마가 지레 아빠나 할머니에게 말 대답해 싸움으로 번지면 어쩌지 하며 늘 불안한 마음으로 살았다.
아빠가 기분이 좋으면 하는 말에 맞장구도 쳐주고 그러나 술기운에 또 기분이 불쾌해지면 동생을 데리고 들어가 오지도 않은 잠을 청했다. 엄마를 앉혀놓고 시작되는 아빠의 일장연설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혹여나 큰소리가 나지 않을까 조마조마했었다. 친할머니와 있을 때는 나의 어떤 행동으로 엄마가 싸잡아서 욕을 먹을 까봐 늘 긴장된 상태였다. 친할머니는 나와 동생이 조그만 실수라도하면 너희 엄마 닮아서 그런다는 등 아빠 못지않게 끊임없이 잔소리를 하셨다.
그중 동생을 미워하게 된 건 엄마의 태도가 그랬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 동생이 부모에게 예쁨을 받는 걸 본 적이 없다. 동생이 고등학교 시절 학업이 아닌 취업으로 노선을 정할 때, 아빠는 어느 때처럼 무관심했고 엄마는 취업에 필요한 배움의 과정을 매우 마땅치 않아 했다. 구첵적으로 말하자면 돈이 들기 때문이었다. 많은 돈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렇게 마땅치 않았던 자식이 고등학교에 졸업하자마자 스무 살 나이면 적은 나이가 아니라며 본인이 다니던 유통업계에 밀어 넣었고 월급을 모조리 가져가 버렸다.
나는 여전히 내 학업, 취업에 몰두한다는 이유로 동생의 상황을 방관했었다. 동생이 엄마의 월급 착취와 구박을 견디지 못해 가출을 했었을 때에도 엄마의 계속되는 한탄에 자세한 상황은 알지도 못한 채 동생을 함께 흉보곤 했었다.
시간이 흘러, 나도 결혼을 하고 동생도 결혼을 한 후, 멀리 떨어져 살기 때문에 지난날은 그저 흘러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 아이를 낳아 길러보니 부모란 어떤 마음인지, 엄마란 어떤 사람인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아이를 키운다는 게 가끔은 영혼을 갈아 넣는다는 표현이 과하지 않을 정도로 지치고 힘든 과정인데 동생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이를 키워보니 떼를 써도 말썽을 부려도 너무나 사랑스러운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제 자식은 그냥 이유 없이 너무나 이쁘기만 한데 불현듯 사랑받지 못한 동생에 대한 미안함이 솟구쳤다.
이래서 자식을 키워봐야 부모의 마음을 안다고 하던데, 나는 자식을 키워보니 내 부모의 마음은 이해가 가지 않았고, 사랑받지 못하고 컸던 동생이 너무나 안쓰러웠다. 하지만 이런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그저 마음속으로만 간직하고 있었는데, 비로소 동생의 곪았던 상처가 터졌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날 나는 속죄할 기회를 가졌던 것이다.
지금은 나에게 동생은 너무나도 애틋한 존재이다. 마냥 어렸던 지난날에 본인보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언니인 내가 참 애쓰고 살았다고 보듬어주는 것도 내 동생이다. 어릴 적 이렇게 서로 아껴주고 사랑하고 살았으면 더 좋았으련만, 이제라도 우리 둘이 서로에게 그런 존재가 된 것 같아 참 다행이다.
내 동생, 더 이상 아프지 말고 움추러들지 말고, 천천히 날개를 펼치렴. 언니가 응원할게.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