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유니 Jan 11. 2024

내가 손주들을 보여주지 않는 이유

대물림 되는 것이 싫다.

 딸은 인공수정 3회, 시험관 2회를 거쳐 결혼 후 8년 만에 세상에 태어난 귀한 아이였다. 임신 초기에 하혈로 한 달 동안 입원하기도 했었고, 회사를 다니느라 힘들었는지 아이는 예정일보다 한 달 일찍 태어났다. 이르긴 했지만 건강하게 태어났고 나도 생각보다 빠르게 몸이 회복되었다. 딸아이는 손주를 오랫동안 기다렸던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사랑을 듬뿍 받았다. 그때 내 엄마는 손녀가 보고 싶어 같은 동네가 아닌데도 매일같이 우리 집에 왔으며 아빠도 시시때때로 우리 가족을 불러내 놀러도 가며 이보다 좋은 외할아버지, 할머니를 볼 수 없을 만큼 손녀에게 정성을 다했다.




 엄마, 아빠가 손녀를 예뻐하고 지극히 아끼는 마음을 보니 결혼 직후 들었던 엄마에 대한 혼란, 미움 등이 사그라지는 걸 느꼈고 내 자식을 돌봐주는 마음에 나의 아픔이나 상처가 치유된다고 생각했다. 표현 없는 아빠에게서는 부성애 비슷한 걸 느껴서 '아, 우리 아빠도 사랑 없는 사람은 아닌가 보다'하며 두 사람의 태도만으로 지난날의 상처가 회복되었다고 생각했다.




 내가 두 번째 아이로 쌍둥이를 갖고 나서, 그리고 낳을 때까지도 그런 마음을 이어져 자발적 착한 딸 노릇을 톡톡히 하곤 했다. 그쯤 엄마는 음식 사업을 시작했고, 난 인터넷 판매, 택배 거래, 홍보, 리뷰 관리 등을 도맡아 했다. 호기롭게 시작했던 엄마의 사업은 가내수공업 수준이었고 주문이 없어도 걱정이었지만 주문이 많으면 나, 아빠 할 것 없이 음식을 만들고 포장하는 작업에 투입되곤 했다. 아이와 나는 엄마의 가게로 매일 출근했고 아이가 기관에 다니기 시작하고 나선 아예 직원처럼 많은 일을 도맡아 했다. 그러다 시험관 시술로 쌍둥이를 가졌고 쌍둥이 임신 중에도 똑같이 일을 했다. 그러다 배가 많이  불러오고 피로감이 심해져 간단한 업무만 집에서 하고 가게에 나가지 않았다. 그 후 쌍둥이를 예정일보다 2달 빨리 조산했다.




 엄마는 나의 도움이 없었으면 사업시작을 할 수 없었다. 인터넷으로 포장 판매하는 사업이었으니 당연히 엄마가 아는 분야가 아니었고, 엄마는 음식을 준비하고 요리하고를 반복할 뿐이었다. 물론 그 작업 역시 너무나 손이 많이 가고 고생스러운 과정이라 나도 매일같이 함께 했었다.




 잘 팔릴 때도 못 팔릴 때도 나한테 돌아오는 몫은 없었다. 나는 1년 6개월 정도 일했는데 수고비로 100만 원 한번, 200만 원 한번 받았다. 하지만 엄마는 기억 속에 오류가 생겼는지 나와 돈에 관한 마찰이 생겼을 때, 내가 쌍둥이를 낳았을 때 내게 200만 원이나 주지 않았냐며 내 수고비로 준 200만 원을 갑자기 손주 탄생기념으로 할머니가 친히 내리신 축의금으로 둔갑시켜 버렸다.




 그러면서 본인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나에게 당연한 업무를 맡겼고 나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많은 일을 했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쌍둥이가 태어나서 더 이상 가게일을 봐줄 없었고, 엄마 자신도 무리하게 일을 탓에 갑상선암에 걸려 결국 사업을 접고야 말았다




 쌍둥이를 키우는 초반엔 부모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 엄마는 엄마대로 갑상선암 수술 직후의 환자이기 때문에 당연히 요양이 필요했고, 아빠는 엄마를 대동하지 않는 이상 혼자 우리 집에 오지는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아이들 돌 무렵 엄마는 건강을 회복했고, 우리는 예전처럼 두 집을 오가며 생활을 했다. 손주가 셋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엄마, 아빠는 아이들을 살뜰히 챙겼고 거의 시간 날 때마다 모든 것을 함께 했다.




 엄마는 두 달에 한번 정도 외할머니댁에 내려가곤 했는데, 그때도 꼭 세 아이중 한 명을 데려가곤 했었다. 딸아이 혼자였을 때에도 종종 있는 일이라 대수롭지 않게 맡기곤 했었는데, 나중엔 그 대상이 쌍둥이 막내로 고정되기 시작했다. 막내는 유난히 울음소리가 잘 그치지 않아 키울 때 애 먹은 부분도 있었지만 유독 할머니, 할아버지를 잘 따르는 아이기도 했다. 게다가 첫째, 둘째는 나와 떨어져 있으려 하지 않아, 할머니인 엄마가 주로 막내의 육아를 담당해 주었다. 그래서 정이 더 들어서일까. 어느 순간 엄마, 아빠 모두 막내만 찾았고, 엄마집에서 저녁을 먹다가 집에 가야 할 때면 막내가 당신 집에 자고 갔으면 했었다.




 나도 내가 편하고자 자주 막내를 맡겼다. 하지만 두 돌 정도 돼 보니 이미 기관도 다니고 있었고 아이가 누나, 형제를 알고 있는데 할머니집에 따로 재우는 게 맘이 편하지 않아 함께 재우게 되었다. 아이도 할머니, 할아버지가 모든 떼를 받아주고 엄한 소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떼가 더 심해지고 왕왕 울어버리는 경우가 심히 있어 안 되겠다 싶은 생각도 있었다.




 나 편하고자 종종 맡겼던 육아가 아이에게 별로 좋지 않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무엇보다 엄마와의 사이가 금이 가면서 엄마, 아빠가 나의 아이를 맡아주는 게 다른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이다. 무엇보다 내 부모님, 둘 사이는 늘 좋지 않았다. 늘 화난 사람처럼 상대에게 틱틱거리는 재주가 있는 아빠와 한 번씩 참은 화를 가감 없이 날것으로 표현하는 엄마 사이에서 우리 아이들은 마치 완충재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아빠가 심기가 불편한 날, 혹은 엄마가 모임 따위로 늦게 들어와 아빠 눈치를 보는 날은 굳이 집에까지 찾아와 아이들 데려가곤 했었다. 물론 그중 할머니, 할아버지를 가장 잘 따르는 막내가 거의 가곤 했었다.




 처음엔 수시로 아이를 찾는 건 할머니, 할아버지가 손주를 찾는 애정이라 생각했지만, 둘 사이가 껄끄러울 때 더 절실히 아이를 찾는다거나, 시골 나의 외할머니댁에 갈 때는 반드시 아이 용돈을 받고야 말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아이를 데려가기도 했었다. 엄마는 꼭 외가를 다녀오면 외삼촌, 외숙모들이 용돈을 얼마를 줬느니 안 줬느니를 따져댔다. 그런 모습이 점차 아이를 핑계로 친정식구한테 하나라도 더 받아먹으려고 하나 하는 생각까지 들자 불편해졌다. 그리고 손주를 기쁨조삼아 친척들에게 보이고 다니는 것도 싫었다.




 게다가 친척들은 친척들대로 엄마가 오롯이 막내는 키워주는 거처럼 알고 있었고 엄마가 고생한다는 등, 막내가 부모와 떨어져 살아 안쓰러우니 잘해줘야 된다는 의 이야기를 수시로 꺼내곤 했다. 나는 분명 세 아이를 키우고 있고 세 아이와 함께 내 부모의 집을 오고 갔는데, 막내에게 집착하는 내 부모 때문에 그런 소리를 듣고 있자니 매우 불편하고 조금은 억울한 점이 있었다.




 물론 엄마나 아빠나 우리 아이를 정성스레 돌봐주는 것은 맞지만, 내가 회사를 다니지 않고 육아에 전념하고 있으며 아이들은 낮에 기관을 가고, 내 부모과 내 아이들이 만나는 시간은 가끔 평일 저녁을 함께 먹는 시간이거나 아빠가 쉬는 일요일 정도였다. 물론 세 아이 전부가 항상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또 착할 딸 본능이 발휘되어 엄마, 아빠의 마음이 갸륵해 매달 적지 않은 돈을 보내곤 했었다.




 정확히 계산할 수는 없지만 지난해 내가 엄마에게 쓴 돈은 꽤 된다. 육아 비용은 따로 드렸고,  중간중간 여행을 자주 다니니 여행경비, 식사비, 또 주말 레저비는 내가 모든 쓴다. 연초에 엄마의 환갑이 있어서 나는 금목걸이 맞춰주었고 현금 200만원을 드렸고  강원도 여행에 돈을 썼고 남편은 꽃바구니를 배달했고 식사대접도 해드렸다. 물론 이에 대해 할 말은 없다. 어찌 됐는 육아도움을 줬으니 몇 시간짜리 아줌마를 써도 다 돈인데, 내 부모에게 이 정도 하는 건 당연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은 쌍방이면 좋았겠지만 실상은 달랐다. 내가 엄마의 가게에서 오롯이 일한 1년 6개월의 시간은 자식으로서 당연한 도리로 포장되었다. 동생의 처지를 무시하고 모른척했던 일을 계기로 자식에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느냐에 말에 돌아온 대답은 자신이 제일 불쌍하다는 고리타분한 레퍼토리와 본인이 아이들 육아를 담당하지 않았냐는 밑도끝도 없는 비난이었다.







  나는 부모에게 값을 지불하고 사는 자식이다. 육아를 공짜로 시키적도 없고 엄마의 전매특허인 김치, 반찬 등으로 소위 돈대신 몸으로 때우는 행동도 하지 않았다. 할 보상은 제대로 하면서도 명절, 기념일 모조리 챙기는 건 내 몫이었다. 아무리 부모자식 간이라고 하지만 육아값은 톡톡히 드리고 있었는데 무슨 억지로 내가 가게에서 보수 없이 일한 값을 본인이 손주 육아를 한다는 명분으로 퉁치고 있었을까. 육아수당과 때때로 가져가는 딸표 보너스를 이렇게도 무참히 입을 닦아버리는 부모라니, 당당해도 이렇게 당당할 수가 없다. 이번엔 물러서지 않고 나도 대거리를 했다. 난 그 이상을 돈으로 지불했는데 나에게 응당한 대가를 지불한 적이 있냐고. 대답이 없다. 그리고 돌아오는 액션은 이제 자식의 태도를 물고 늘어지는 거다. 지친다.




 그때 깨달았다. 내 부모는 내 자식에게도 훗날 보상을 요구하겠구나. 어릴 적부터 부모의 힘든 모습을 보고 자랐던 애늙은이, 어른아이가 바로 내 아이들이 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예전의 나처럼 사이가 좋지 않은 할아버지, 할머니 사이에서 우리 아이들이 아무것도 걸러지지 않은 채 자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 퍼뜩 정신이 차려졌다.




 부모는 아이의 우주라고 하는데 태어나면서 함께한 할아버지, 할머니도 그에 못지않은 존재이다. 우리 아이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꼽으라 하면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가 함께 나온다. 그렇다고 부모인 내 감정을 뒤로한 채 내 아이들만 왕래시킬 수도 없었다. 부모의 불편한 마음은 자식에게 그대로 투영되는데 나 자신을 속이면서까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 악순환을 끊어내기 위해 아이들을 엄마집에 보내지 않는다. 그 사이에 엄마의 절절한 호소, 아빠의 일방적인 연락으로 아이들만 잠시 왕래했었지만 결국 그럴 때마다 내가 탈이 나서 그만두기로 했다. 특히 딸아이는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추억이 많아 심심치 않게 두 사람을 찾는다. 매번 에둘러가며 할머니 병원 가셨고 할어버지는 회사에 가셔서 안된다고 했지만 뻔한 거짓말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 그러다 이렇게 말해주었다. "미안해, 엄마가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마음이 다쳐서 지금은 만나고 싶지 않아." 영문을 모르지만 엄마의 거절에 딸아이의 눈이 눈물로 가득 찬다. 내 부모는 안 보고 싶은데 딸아이의 눈물을 보면 마음이 약해진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지금은 내 가족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 나는 부모를 등지고 살 수밖에 없다. 부디 내 딸이 커서 나의 마음을 이해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이전 05화 나 또한 가해자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