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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유니 Jan 04. 2024

효녀가 아니라 호구였다.

당연한 것은 없다.


 전화상으로 아빠와의 고성이 오간 건 지난 4월의 일이다. 뜬금없는 고성, 막말, 쌍욕에 하다못해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까지 당장 우리 집을 부수고 들어올 기세로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린다. 어안이 벙벙하고 손발이 떨리고 진짜 쳐들 올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얼른 현관문을 이중으로 잠가버렸다. 진정되지 않은 마음을 붙잡고 있는데,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차가운 목소리로 아빠가 가면 문 열어주지 말라고.. 이 상황이 어이가 없고 열이 뻗쳐서 휴대폰에 대고 소리소리 질렀다. 딸 해코지하겠다는 당신 남편을 말리지도 않은 채 지금 그게 내게 할 소리냐고.. 그날 내 부모라는 사람은 이제껏 내가 본모습 중에 가장 천박하고 무식했다.




자식에게 키워준 값을 따져보자는 부모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 나는 악에 바쳐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건 당연한 거지 그렇게 말하고 싶으면 자식 성인이 된 후의 이야기를 해보자고 소리를 질렀다. 성인이 된 후 대학 등록금을 벌었고 용돈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계속해왔다. 내가 등록금 때문에 손 벌 린 적은 거의 없었다. 내가 학비라도 받아쓴 적이 있느냐고 되묻자 핸드폰 너머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건 장학금 받아서잖아!"라고.. 세상에.. 장학금은 어디 거저 나오나? 그래서 학비를 대줄 필요가 없었다고 말하고 싶은 걸까.. 자식의 딱함과 고생스러움도 본인들의 처지 앞에선 그저 당연히  할 도리라고 생각하나 보다.




 그날 내 부모는 처음 내보인 자식의 상처와 희생을 본인들에게 돈 좀 썼다고 유세 떠는 파렴치한 행동으로 몰아갔다. 입에 담기도 힘든 쌍욕과 고성보다 더 참기 힘들었던 것은 자식을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치부한 것, 너무나 힘들었다는 간곡한 호소를 비아냥거리며 묵살해 버린 점이다.




 그동안 꽁꽁 쌓아둔 감정 표출의 발단은 한국을 오랜만에 방문한 동생 가족에 대한 냉대에서 비롯되었다..




동생은 10년 전 결혼을 했다. 홍콩사람인 남편과 홍콩에서 10살 된 조카를 키우면서 살고 있다. 조카는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발달장애판정을 받았다. 염색체 이상으로 발달장애를 가지고 있으며 자폐, 뇌전증을 앓고 있다. 높은 물가의 타지생활에 장애아를 키우는 동생은 삶은 당연히 순탄치 않았다.




 부모는 동생의 녹록지 못한 삶을 애써 모른척하며 지냈다. 동생이 코로나가 터지기 전 일 년의 한두 번씩 한국에 오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했다. 그래도 냉대까지는 아니었는데 이번 부모의 외면은 가차 없었다.




 동생은 재작년에 3년 만에 조카와 한국을 방문했다. 오랜만에 열린 하늘길에 그동안 대면으로 하지 못했던 효도를 하기 위해 많은 선물을 잔뜩 들고 왔다. 나 또한 쌍둥이 육아를 엄마와 같이 했으므로 따로 드리는 비용 말고도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동생은 엄마에게 명품지갑, 아빠에겐 명품허리띠를 선물했고 나는 엄마에게 준명품 가방 그리고 우리는 함께 안마의자를 선물했다.




 동생은 그리고 지난 4월에 남편, 조카와 함께 다시 방문했다. 동생은 아이의 치료를 위해 한국을 다시 찾은 것인데, 엄마는 재작년 동생에게서 생활비로 받은 돈 500만 원에 꽂혀 있었나 보다. 갚으라고 한 적은 없다. 다만 본인이 받은 돈에 대한 부채의식이 높았는지 동생 내외를 매우 어색하게 대했다. 본인 이외의 별 관심이 없는 아빠는 본인이 몸이 안 좋아서 도착 첫날 인사를 받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이 언제 인사하러 오나 하며 벼르고 있었나 보다.




 제부 입장에서 보면 5년 만의 방문이다. 길지 않은 일정이 바빴던 건 사실이지만 장인장모의 환대를 받는 시간이야 없었을까. 하지만 엄마는 요구하지 않은 돈 생각에 혼자 데면데면, 아빠는 인사를 먼저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울그락불그락, 이렇게 환상의 짝꿍도 없다. 평소에도 이렇게 죽이 잘 맞는 부부였다면 오죽이나 좋았을까.




 한국에 온 지 셋째 날 온 가족이 모였다. 조카의 병원 일정, 아빠의 컨디션 다운으로 셋째 날 저녁을 같이 하기로 했다. 그나마 넓은 우리 집으로 모이기로는 했지만, 5년 만에 사위가 왔으니 저녁상을 차리던지 시키던지 외식을 하던지 부모라면 응당 고민하는 척이라도 해야 되지 않나. 굳이 병원 투어를 하는 동생내외를 불러 5분 거리의 아빠집에 인사를 시키고 함께 우리 집에 도착했다. 동생이 부모님 드린다고 마장동 고기를 사 왔고, 때마침 함께 시킨 중식요리가 도착했는데 말릴 새도 없이 자연스럽게 동생이 결제를 했다. 내 부모는 소파에 앉아서 저녁상이 차려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5년 만에 사위를 위해 모인 저녁 자리인데, 동생이 사 온 고기에 동생이 결제를 한 중식요리에.. 뭔가 이상해도 이상하지 않은가. 나는 나대로 어이가 없었고 동생은 동생대로 할 말을 잃었는지 저녁 식사 내내 어색하게 떠드는 건 내 부모뿐이었다.




 불편하고 어이없는 이 상황을 본인들도 충분히 느꼈을 거다. 다음날 제부가 먼저 출국을 했고 엄마는 뜬금없이 그날 저녁 상을 차렸다. 남편이 부모의 환대를 받지도 못한 자리에서 동생의 목구멍에 밥이 넘어갈 리 없었다. 그 반응마저 맘에 안 들었을까, 아니면 도둑이 제 발 저린 심정으로 불안했을까. 부모는 밑도 끝도 없이 동생의 태도, 나의 차가운 반응을 비난하며 불효자식으로 몰아갔다. 나는 무기력하게 처절하게 꺼져가는 동생을 보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엄마는 평생 본인 편이 아닌 아빠를 앞세우고 뒤로 물러나 그저 부모라는 이름의 한통속으로 우리를 천하의 나쁜 년으로 몰고 간다. 그러면서 본인이 속불편해 갚아버린 동생의 500만 원과 뜬금없이 조카치료비에 쓰라며 난생처음 건넨 200만 원 이야기를 하며 그래서 돈 주지 않았냐며 고성을 지른다.




 그날 이후로 동생은 그대로 출국을 해버렸고, 난 내 부모를 용서하지 않는다. 그 일이 있고 한 달여만의 두 사람의 간곡한 부탁으로 세 아이를 그 집에 데려다주었다. 하지만 나의 아이들이 왕래하고 나니 동생은 타지에 나가있다는 이유로 잊힌 존재가 되었고, 나는 내 부모에게 사과를 받지 못한 채 예전과 같은 생활을 유지한다는 게 참을 수가 없었다. 주말마다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손주들을 찾는 행태에 나는 주말만 되면 신경이 곤두서고 잠을 자지 못하는 히스테릭한 상태가 되어 버렸다.




 내 마음의 깊은 상처를 깨닫고 나니 더 이상 가족이란 이름으로 그냥 덮어지지 않았다. 자식을 돈으로 여기는 부모와 더 이상 왕래하지 않겠다고, 제발 부탁이니 연락하지 말아 달라고 말했다. 그 이후 엄마는 엄마의 방식대로 허리를 숙여 자세를 바짝 낮춰오고, 아빠는 아빠의 방식대로 엄마의 입원을 무기 삼아 나에게 고압적인 태도로 연락을 해왔다. 둘 다 그저 자식은 상관없고 눈에 히는 손주들을 보겠다는 심산이다. 외국에 사는 장애를 가진 손녀는 찾은 적도 없는 그들이 말이다. 나는 모든 연락에 대응하지 않다가 부모의 일방적인 문자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나를 보며 나를 위해 절연을 선언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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