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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유니 Dec 31. 2023

부모가 방치한 딸의 결혼

 사랑하긴 했었나요

  '..... 특히 내 결혼을 간절히 기다렸던 엄마는 소회가 남달랐다. 우리는 어차피 외국에서 살아야 했고...( 중략)... 그래도 꼭 좋은 이불 한 채 해주고 싶었다며 비싼 구스이불에 목화솜 침대패드에 종류별로 마련해 주셨다.

 또 내가 대학생이었던 한참 옛날에, 엄마가 어떤 기회로 마련해 놨던 귀한 예물 그릇 세트며 은수저까지 곱게 포장해서 주셨다. 실크 보자기에 싸여있던 그것들은 엄마가 간직하던 노리개까지 달려있어서 리본을 풀러 보기도 전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by NANU/ 카카오브런치)


 결혼을 앞둔 딸을 보는 엄마의 애달프고 따스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래서 부러워지는 글이다.



 

 내가 12년 전 남편과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엄마는 속으로 아연실색했던 거 같다. 집에 보탬이 되던 딸이라 떠나는 게  싫었을까. 아님 본인 말대로 정말 사랑한 딸이라 그랬을까. 그땐 이유 알지 못했다. 다만 본인이 사랑하는 딸의 결혼에 대줄 자금이 없으니(정확히는 1,000만 원이라도 줘야 될 거 같으니 기다려달라는..) 1년 후로 결혼날짜를 잡았으면 했다.



 그게 엄마의 마음이라 생각했다. 안 하는 것과 못하는 마음은 분명 다르지 않은가. 그래서 착한 딸은 엄마의 말을 믿고 기다렸다. 1년 후 상견례를 하고 결혼 날짜를 잡았다. 하지만 분명 결혼준비를 하고 있었는데도 엄마에겐 별 다른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 직감적으로 얘기를 해야 한다 생각했다. 시댁에 예단을 보내고 양복을 맞추고 그런 이야기를 했던 거 같다. 그때 이미 남편의 동생이 먼저 결혼을 했기에 여자 쪽에서 준비했던 예단금액을  기준 삼아 얘기했었나 보다. 하지만 결혼준비가 어디 예단에서만 끝날까.



 

 나는 예단을 얼마 준비하고 예물로 어떤 패물, 명품가방은 받았는지 떠들어대는 친구들 앞에서 입만 꾹 다물고 있을 뿐이다.  당시 지인들은 시댁에 약 1,000만 원의 예단금을 보내고 반정도를 돌려받았다. 그건 시댁에 보내는 예단비만을 의미할 뿐 결혼 준비엔 훨씬 큰돈이 들어간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신혼집, 신혼여행, 드레스, 웨딩촬영, 결혼식까지 모든 게 다 돈이다.




 직장 3년 차에 모아둔 돈은 딱 1,000만 원이었다. 1년간 엄마에게 100만 원씩 1,200만 원을 드렸고 학자금 대출을 갚았으며, 부모님 제주도 여행을 시켜드렸다. 물론 때마다 명절, 생신, 어버이날을 챙겼다.  그 사이 엄마는 내 이름으로 1,000만 원짜리 마이너스 대출을 받아 갚고 있었다.




 한창 결혼준비를 할 때 엄마가 봉투로 들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300만 원이야.. 이거 구하려고 보험대출까지 받았어." 뒤통수를 크게 맞은 듯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돈 300만 원에 굳이 필요치 않은 부연설명이라니, 그땐 당황스러운 마음이 앞서 화도 내지 못했고, 물론 그 돈이라도 줘서 고맙다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시어머니께 드리고 절반 정도 받은 돈은 우리 부부의 한복, 엄마의 한복비 정도로 나갔었나 보다. 그리고 엄마에게 이브자리에서 여름이불세트 50만 원짜리를 받았다. 분명 혼수는 같이 보러 다녔는데 소파, 에어컨, 장롱, 침대.. 모두 내 돈으로 결제했다. 딱 거기까지였나 보다. 돈 300만 원으로 입 닦아버리는 부모라니.. 글을 쓰는 이 와중에도 어이가 없을 뿐이다.




 부모가 자식 결혼에 돈을 보태고 안 보태고는 중요하지 않다. 금액이 얼마인지도 중요하지 않다. 그저 딸을 시집보내는 애달픈 마음, 딸이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면 족하다. 돈 300만 원뿐이여도 사정이 여의치 않아 이것밖에 해줄 수 없어서 미안하다고 했다면 감사히 받았을 거다.

  



 엄마는 자식이 돈을 벌기 시작한 후로 매달 월급을 요구했다. 용돈 수준이 아니었다. 동생과 내게 100만 원씩 가져갔다. 나는 박봉의 사회초년생이었고, 동생은 그런 나보다도 월급이 적은 계약직 직원이었다. 엄마는 월급을 가져갈 때면 너희들 결혼할 때 모아 주겠다며 묻지도 않은 말을 매번 했었다. 받아간 돈은 바라지도 않았지만 본인이 말한 1,000만 원은 주지도 않을 거면서 결혼은 왜 1년 후로 미루라고 했을까. 그저 본인에게 고분고분했던 딸이니 1년만이라도 곁에 붙들고 싶었나 보다.




 결혼준비로 돌아가서,  이대로 가다간 내 앞으로 들어오는 축의금마저 가져갈 수 없을 거 같았다. 결혼 준비를 부모와 같이 했다면 축의금 생각을 따로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가 하는 행태를 보니 난 결혼 준비만으로 마이너스로 출발해야 할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무엇보다 남편 될 사람에게 미안했다. 전세 8,500만 원의 빌라를 본인이 3,500만 원이라는 대출을 받아 마련해 주었는데, 난 축의금까지 건지지 못한다면 함께 출발하는 새 인생이 미안함으로 시작될 것만 같았다.



 

 마음을 부여잡고 나에게 들어오는 축의금은 내가 가져가고 싶다고 말을 했다. 엄마는 대답이 없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왜 대답이 없는지도 어이가 없고, 결국은 내가 말을 하지 않았으면 본인이 다 챙길 심산이었다는 게 정말 화가 난다. 나는 그때 여전히 엄마에 대한 감정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미안함과 곤역스러움을 가지고 어렵게 얘기했었다.  결혼식이 끝난 후 식대와 결혼식 대관 비용 등을 축의금에서 정산했고, 그 나머지 돈의 반을 받았던 것 같다. 지독하다. 엄마의 셈법은 지금 생각해 봐도 지독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엄마는 내가 결혼을 한 후 남편같이 생각했던 딸이 떠나서 우울증에 걸렸다고 했다. 아빠는 주말마다 우리 부부와 함께 시간을 가지기를 원했다. 내 결혼식 후 힘들어하는 엄마, 사위에게 가족의 의무를 강조하는 아빠 때문에 나는 내 결혼에 대한 서글픔과 서운함 대신 부모에 대한 죄책감과 미안함을 가지고 살았던 것이다. 그리고 내 착한 딸 콤플렉스 병에 남편까지 탑승시켜 버렸다. 남들 눈에 우리 부부는 언제나 부모님과 모든 걸 함께하는 착한 딸, 착한 사위였고 내 부모는 그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며 살았다.



 

 지금 우리 부부에게 세 아이가 있다. 첫째가 딸 아이다. 가끔 내 딸이 커서 결혼을 하는 상상을 하곤 한다.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촉촉해지고 뭉클해진다. 나 역시 고급스러운 이불 한 채, 보자기에 포장된 예쁜 그릇 혹은 마음을 담은 예쁜 옷 한 벌 곱디곱게 싸서 딸아이에게 직접 전달해 줄 것 같다. 결혼 과정에서 부모가 얼마를 보태고, 얼마를 보내고 중요하지 않다. 마음을 담은 정성스러운 행동 하나하나가 "나의 예쁘고 예쁜 귀한 딸아, 결혼해서도 언제나 귀하게 대접받고 어여삐 예쁨 받고 살렴."이라는 마음의 표현이 아닐까.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은 딸아이를 가진 엄마의 마음으로 그렇게 할 것 같다.




 나는 내 부모에게 그만큼의 존재도 아니었을까. 말 잘 들어서 예쁘다던 딸, 공부 잘해서 예쁘다던 딸, 시집가서 너무 서운하다는 딸, 시집간 이후에도 효도하는 딸..' 더 이상의 수식이 더 필요할까. 그냥 자식은 자식인데 많은 수식어를 요구했던 내 부모에게 나는 그저 다른 사람이 가족이 되기에 본인들이 보내기 아까웠던 가족 구성원 중 하나였을까. 이것이 내가 결혼식만 떠올리면 아직도 마음이 아픈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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