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살아 있게 하는 말은 무엇입니까 중, 마법같은 Prologue
마법같은 프롤로그 "자기 자신을 말하기" 내용을 옮겨적어 봅니다. (일부 생략 및 편집)
... 상인과 여행자들은 밤이 되면 시장 주변에 환히 밝혀지는 모닥불 앞 통에 앉거나 양탄자에 비스듬히 누워 이야기를 시작한다. 누군가 늑대, 누이, 숨겨진 보물, 전투 같은 말을 할 때 마다 다른 사람들도 자기가 아는 늑대, 누이, 숨겨진 보물, 전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긴 여행 끝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우리는 지나간 추억들을 하나씩 곱씹어 본다. 그래서 각자 온 곳으로 돌아갈 때 우리의 늑대는 다른 늑대가 되고 누이는 다른 누이가 되고 전투는 다른 전투가 되고 또 많은 단어들이 새로운 의미를 가진 다른 단어가 되고 어쩌면 우리도 다른 사람이 ...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 글의 제목은 '도시와 교환'이다.
칼비노는 도시는 돈과 상품만 교환되는 곳이 아니라 이야기, 경험, 추억들도 교환되는 곳이라고 말하려는 것이었을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나 자신에게 이런 질문들을 많이 던졌다. '살아 있는데, 이 살아 있다는 것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 무슨 말을 나눠야 할까?' 그 질문을 중심으로 여러 생각들이 잔물결처럼 퍼져나갔다. 흔하디흔한 시장 한구석이 특별해 지는 것은 우리가 나 아닌 다른 누군가를 만났기 때문이고, 내가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 있다는 것은 내가 아직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는 뜻이 될 것이다.
나는 언어가 우리를 구해줄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새로운 생각, 새로운 말, 새로운 이야기가 있는 곳에서 새로운 사람이 태어난다고 믿고 있다. 수천년 동안 인간 삶은 그렇게 변해왔다. 그러니 나에게서 어떤 새로운 말도, 이야기도 나오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오늘 내가 가장 슬퍼해야 할 일이다.
수년 전, 나는 <자기 자신을 말하기> 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이 프로그램 참여자가 지켜야 하는 규칙은 자기 자신을 말하되 특정한 단어는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단어 없이는 자신을 말할 수 없거나, 자신이 아닌 것 처럼 느껴지는 단어가 금지된다. 서점 주인은 '서점'을, 라디오 피디는 '라디오'를 쓸 수 없다.
그 금지 단어를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은 피디가 아니라 출연자 자신 뿐이다. 자기 자신을 말하기 이전에 자기 질문이 있는 것이다. '그것 없이는 나를 말할 수 없는 단어가 뭐지? 그런게 있기는 있나? 그 단어가 왜 나에게 중요하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면 자신의 삶을 꽤나 뒤적거려봐야 한다. 그 과정부터가 프로그램의 시작인 셈이다. 누구나 조용히 가슴속을 들여다 보면 몇 개의 단어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보르헤스는 자신의 인생은 열 개 정도의 단어로 압축될 것이라고 했다. 시간, 불멸, 거울, 미로, 실명, 시는 보르헤스가 평생 열정을 기울여 그 의미를 확장시키려고 노력한 단어다. 위화 역시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에서 독서, 글쓰기, 루쉰, 차이, 혁명 등 열개의 단어로 그의 인생을 그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도 이처럼 결코 지원지지 않는 흔적 같은 단어 몇 개를 가슴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가슴속에 머무는 비밀스러운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 단어들은 잊지 못할 이름일 수도 있고 사랑, 우정, 약속, 배신, 상실, 후회, 양심, 용기, 죄책감 같은 추상적인 단어일 수도 있고, 그리스, 지중해, 5월 12일, 라이카 카메라, 강아지, 피아노, 샤갈의 눈내리는 마을 처럼 구체적 단어일 수도 있다.
지금 여기 적은 단어들은 그냥 손가락이 가는대로 쓴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우리의 신비로운 무의식이 이 단어들을 쓰고 싶어 한 것은 아닐까? 지금 이렇게 단어들을 써보는 것만으로도 몇몇 단어들이 몹시 그리워졌다면, 그것은 왜 그럴까? 그것에 대해서 나는 결국 알게 될 것인가? 일단은 이야기를 더 해보겠다.
우리가 서로의 단어를 알고 싶어 하는 것은 그 자체로 감동적인 면이 있다. 세상은 열심히 우리의 이름과 고유성을 지운다. 알바생, 취준생, 택배 아저씨, 애 못낳는 사람, 세 번째 사귄 여자 등 누군가를 지칭하는 온갖 말 그리고 1인 가족 수, 산재 사망자수 등의 숫자. 그런데 이 말 과 숫자들 중 어느 것도 한 사람의 고유함을 말해주거나 우리가 다른 사람을 상상하게 도와주지 않는다.
우리 모두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었는데, 바로 이 모습이 되어서 살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우리는 현실이라는 단어를 쉽게 쓰지만 내가 나라는 것이 각자의 가장 무거우면서도 놀라운 현실이다. 우리의 고유성은 계속 하나의 범주로, 하나의 숫자로 지워져만 간다. 그러나 세상이 우리의 고유성을 지울수록 자기 자신만은 자신의 고유성, 내면에 '살아 있는' 어쩌면 아직은 '이름 없는' 뭔가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다른 사람도 고유한 무엇인가를 품고 있다고, 우리가 궁금해할 무엇인가를 품고 있다고 믿는 것은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는 거의 '저항'이라고 부를 만한 일이고 최고의 존중이다.
자신의 단어를 찾는 것은 쉬워 보여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단어를 찾으려면 마음의 변화가 필요하다. 늘 보던 대로 자신을 보고, 늘 하던 이야기만 해서는 단어를 잘 찾아낼 수도, 설령 찾았다 해도 말할 방법을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 마음의 변화는 시간을 필요로 하고 제대로 말하기는 훈련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것은 시간을 들일 가치가 있는 일이다. 우리가 의식했건 의식하지 못했던 간에 우리에게 중요한 단어 위에 다양한 현실이 달라붙는다. 그래서 에이드리언 이치는 "단어들이 지도"라는 표현을 썼다.
미래는 불확실하고 불안하다. 하지만 누구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 확실히 아는 것이 있다. 우리는 말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말하기, 이야기하기는 우리 영혼에 새겨져 있다. 어쉴러 K. 르 귄은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에서 이렇게 썼다.
글을 시작할 때 중요한 건 단순히 이거에요.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 성장하고 싶어 하는 씨앗이죠. 여러분은 주의 깊게, 조심스럽게, 그리고 끈기 있게 싹을 붇돋고 움을 틔우게 할 수 있어요.
그 이야기가 온전하고 진실되게 스스로를 갖추게 놓아둘 수 있다면, 그게 정말로 무슨 이야기이며 무슨 말을 하는지, 왜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알게 될지도 몰라요. 그리고 놀라게 될지도 몰라요. 여러분은 달리아를 심었다고 생각했는데, 튀어나온 걸 보니 가지인 거죠!
나는 마지막 대목을 '진실한 말(자신의 단어)이 삶을 놀라운 것으로 만들어준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한 번 놀라고 나면 그다음 놀라움도 가능하다. 이야기의 신비로움은 하나의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야기의 신비로움은 삶의 신비로움이 된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삶의 신비로움 없이는 이야기가 없다. 좋은 이야기 안에는 늘 원인과 결과의 딱딱한 인과론만으로도, 숫자로도 잘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이것이 모든 좋은 이야기 안에 있는 '고유한 기쁨'이다.
나는 현재 우리의 위기는 미래를 말하지 않는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미래를 위한 대안을 질문하고 말하는 것을 너무 큰 일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살아 있는 자들이 진정으로 알고 싶어 하는 유일한 것은 자신의 미래다. 진정으로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은 좋은 미래다. 우리가 이 좋은 미래를 만나는 방법은 좋은 미래에 대해 많이 이야기 하는 것이다. 한 새로운 세계의 창조 앞에는 언제나 언어와 이야기가 있어왔다.
한 사람의 좋은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된다.
좋은 이야기는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 부르럽게 각인되고 남아서 우리의 자아를 바꾼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부드러움 중 가장 믿을 수 없을 만큼 부드러운 것은 인간의 변화다. 존 버져는 내 이야기를 "어떤 이야기에 감명을 받거나 울림을 얻으면, 그 이야기는 우리의 본질적인 일부가 되는, 혹은 될 수 있는 무언가를 낳고, 이 일부가, 그게 작은 것이든 광대한 것이든 상관없이, 말하자면 그 이야기의 후예 또는 후계자가 된다"고 썼다.
우리는 우리가 한번 사로잡힌 이야기에서 헤어 나올 수 없고 우리 삶은 우리가 들었던 이야기들의 결론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가 가치를 두는 이야기 안에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바로 그것, 우리의 미래, 우리의 최종 결론을 암시하는 무엇인가가 있다. 한번 들으면 빠져나올 수 없는 이야기들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운명을 정의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이렇게 진실된 각자의 '고유한 기쁨'들을 나누며 살고 싶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나'라는 단어에서 수없이 많은 좋은 이야기들이 솟구쳐 나오는 것이다. 나라는 단어에서 나온 이야기가 이 슬픈 세상에 기쁨을 만드는 것이 내가 가장 보고 싶은 풍경이다. 저마다의 고유함이, 이름이, 개성이, 세상에 잊을 수 없는, 두번 다시 들을 수 없는 목소리를 선물하는 것을 보고 싶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일부분이다. 나의 가치는 내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가치와 같다. 내가 살리고 전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나다." 내가 힘을 잃을 때 나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이다.
나는 그 어느 때 보다 더 내 인생을 걸 가치가 있는 단어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이야기가 하고 싶었다. 몇몇 단어 안에 비밀이 있다.
이야기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바꾼다.
우선 이야기를 하면서 나부터 새롭게 바뀌고 싶다.
나의 누이는 너의 누이가 되고 나의 전투는 너의 전투가 되고
나의 늑대는 너의 늑대가 되고 너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가 되고
너의 슬품은 나의 슬픔이 되고...
그리고 다음번에는, 우리 정말로 더 잘 사랑해야 한다.
처음에 사랑했던 것보다 더 많이.
#사람 #성장 #가치 #책 #이야기 #다정함 #쓰기 #이끌기 #변화 #매버릭 #B #자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