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세맑 Oct 12. 2023

공무원, 그리고 어른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오늘도 내 세상은 말다

  꿈이 많았던 23살, 시각장애로 군대를 면제받아 동기 남자아이들보다는 조금 일찍 4학년 졸업반이 되었지만, 잠시 꿈을 찾을 시간을 갖기로 하고 휴학계를 냈습니다.



  처음에는 뭐부터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을 하다가 기본 중에 기본인 토익과 오픽을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뭔가 잘 해낼 것이라는 근자감에 빠져 대기업 사원증을 목에 건 모습을 상상하곤 했고,  돌이켜 보면 그 상상이 저에게 동기부여가 되어주었습니다. 그렇게 오전에는 종로에 있는 해커스에서 수업을 듣고 오후에는 학원에서 자습을 하고 저녁에는 명동에 있는 뷔페에서 접시를 닦으며 용돈을 벌었습니다. 나름 체계적이었으며, 뿌듯한 하루하루였습니다.


  6개월이 흐르고 영어점수를 취득했지만, 이것만으로는 택도 없었기에 서류전형에서 시원하게 광탈했습니다. 그러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의 소개로 서울시 교육청에서 잠깐 근무하게 되었고 이곳에서 근무하시는 분들이 저의 일하는 모습을 보고는 공무원이 적성에 맞아 보인다며 공무원 시험을 권유하셨습니다. 그렇게 저는 계약기간이었던 5개월 동안 일도 하고 회식도 참여하고 행사에 참여도 하며 공무원 맛보기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편안하고 행복했던 시간 후, 계약이 만료되고 새해가 밝았습니다. 전 역시나 근자감에 차 휴학을 1년 연장하고 공시(공무원 시험의 준말)를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 어쩌면 계약기간 동안 일했던 제 모습이 스스로도 만족스러웠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수능 과목이었던 국어, 영어, 한국사가 공시에도 있어 내심 만만하게 봤습니다. 그러나 처음 4월 국가직, 6월 서울시 시험에 낙방하고 나니 역시 아무나 되는 건 아니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근자감과 불안감이 공존하던 어느 날, 아빠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엄마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병원이니 누나랑 와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이런 상황은 드라마나 영화 안에서만 있었지. 제가 실제로 겪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일단 누나랑 병원으로 향하며 제발 무사하기를 바라고 바랐습니다. 그때 정신이 없어서 그때 엄마의 상태가 어땠는지 자세히 생각이 안 나지만, 의식이 있는 것을 확인하였고 이곳저곳 다쳐 피가 고여 있어 피를 빼내야 된다는 것만 들었습니다. 그 후 사건경위를 들었는데 과속차량이 신호위반을 하다 엄마를 치였다고 하였습니다. 몸에서 피가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고 당장 불러다 능지처참이라도 시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렇게 엄마의 입원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동안 몸을 제대로 챙기지 않고 바깥일과 집안일을 하느라 많이 약해져 있던 상태라 걱정이 더욱 컸습니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고 치료도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이때부터는 아빠, 누나와 내가 돌아가며 병간호를 했고 누나와 내가 돌아가며 집안일을 했습니다. 모두 비상계엄령이 내려진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본인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시험 준비를 가볍게만 임하던 나에게 그렇게 엄마의 교통사고는 ‘이제는 진지하게 공무원 시험을 임해봐야겠다’라는 각성제가 되었습니다. 제 인생 중 손에 꼽을 만큼의 꽤나 큰 충격이었고, 부모님이 언제든 내 옆에 계실 거라는 장담을 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구나 를 깨달았습니다. 스스로 각성이라도 한 듯, 3-4시간 쪽잠을 자가며 공부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한 해를 마무리하고 복학을 했고 도서관에서 공부만 하며 지내다 드디어 4월이 됐습니다.


  한 번의 낙방과 한 해의 공부, 작년의 근자감보다는 조금이지만 1년이라는 근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국가직, 교행직, 서울시 줄줄이 낙방하고 나서 멘털이 붕괴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들여온 시간과 노력이 너무나도 컸고 이대로라면 다시 본다고 해도 붙을 자신이 없었습니다. 불안감은 확신이 되어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짊어져야 할 책임이 커지는 게 무척 부답스러웠습니다.




  어쩔 수 없는 삼수, 강제적으로 배수의 진을 칠 수밖에 없었으며 정말 사회라는 눈보라 한복판에 홀로 있는 것 같았습니다. 나의 판단 미스가 엄청난 결과를 초례했습니다. 기출문제를 풀어도 현장 모의고사를 봐도 상담을 받아도 불안감이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극심한 스트레스는 불면증으로 이어졌고 생전 안 보던 성경책까지 읽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날 붙여주기를 바라기보단 나의 심신을 안정시켜 주길 바랐습니다. 공부를 하는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은 없었기에 공부에 집중했고 2학기말 졸업논문을 내고 무사히 학기를 마쳤습니다.


  이제 남은 건 6개월. 예전과는 다르게 돈도 벌어야 했기에 CJ제일제당에서 계약직으로 재택근무를 하며 집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절심함보다는 두려움에 집에 있어도 나태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4월 국가직 시험을 떨어지고 멘털이 흔들렸지만 서울시를 최종목표로 했기 때문에 마음을 가다듬고 공단기 학원에서 짜놓은 커리큘럼대로 딴생각하지 않고 따라갔습니다. 6월 서울시시험을 치르고 가채점을 했을 때 커트라인보다 50점이 높있습니다. 아직 발표도 하지 않았기에 애써 들뜬 기분을 숨기며 태연한 척 행동했지만 기분이 무척 좋았습니다.


  8월 필기합격자 발표날이 되고 그 전날에 친구의 입원으로 밤새 친구 병실에 있다가 집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날은 재택근무를 위해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는데 기분이 싱숭생숭했습니다. 집에 도착해서 업무준비를 마치고 액셀로 된 합격자 명단에서 내 수험번호를 확인했을 때 몇 번이나 다시 내 수험번호를 확인했습니다. 묵은 체기가 내려가는 기분이었고 기쁘고 후련했습니다. 최종합격도 아니었지만 필기점수가 높아 면접장에서 똥을 싸지 않는 한 합격이었고 혹시나 몰라서 해커스 면접학원을 다녔고 11월 최종합격 되었습니다.

 
  수험생활 2년 6개월 동안 인생의 희로애락이 다 있었습니다. 원망도 많이 했고 힘들었지만 견뎌내고 보니 이전보다 성숙해졌고 성장해 있었습니다. 새로운 마음가짐을 다지며 첫 공직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이전 09화 장애인식에 대한 도전, 서울시교육청 근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