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곁에 계실 것만 같았던 아버지가 두 해전 천국 가셨다. 세 자매는 홀로 계신 엄마 모시고 제주여행을 계획했다. 선장이셨던 아버지가 “제주 날씨는 도깨비 날씨다”라고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추워진다는 11월 끝자락에 겨울옷, 우산도 준비하며 짐을 꾸렸다. 여든셋 엄마를 생각해서 많이 걸어야 하는 코스는 뒤로했다. 솔직히 일정을 잡을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아 그때그때 의논해서 다녀보기로 했다.
일찍 여정을 시작해제주에서 아침을 먹기로 한다. 조천읍에 있는 ‘방주 할머니 식당’에서 고사리 비빔밥, 도토리부침개, 두부전골, 검정콩국수, 곰취 만두까지…, 특히 밑반찬으로 나온 ‘시래기무침’은 모두의 입맛에 최고점을 받았다. 건강식으로 유명한 동네식당에서 참으로 흡족한 식사를 했다.
막내 여동생은 운전하는 걸 즐겨한다. 여행 때마다 운전담당이다. 식사 후 근처 ‘에코랜드’에서 기차를 타기로 했다. 약간의 바람과 비가 시작되었다. 조용히 걷기엔 딱 좋은 날씨다. 기차를 타면서 내리고 싶은 곳에 내리면 된다. 테마 별로 조성되어 있는 동백숲에 들어설 때 동백꽃 향기를 처음 맡아보았다. 향기를 담아 올 수만 있다면 하고 잠시 미소를 지어 본다. 여러 곳에 포토존이 있어 엄마랑 우리 셋은 사진으로 시간을 담아본다. 다시 기차에 올라 숲을 지날 때 제주의 돌담이 강한 비바람에도 넘어지지 않는 이유는 돌과 돌 사이의 공간 때문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완벽히 꽉 찬 것보다 바람이 지나갈 수 있는 공간을 내어 줌으로 돌담은 제 몫을 다한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로 빈틈이 있어야 인간미 있어 보인다는 생각도 했다.
이제 서귀포 남원읍에 있는 동백수목원이다.
45년 이상 된 동백나무 숲은 제주의 기념물이다. 키 큰 동백나무 사이로 뛰어다니며 사진 찍기에 열을 올릴 때 철없어 보이는 딸들을 바라보는 엄마는 결국 웃음보를 터뜨렸다. 숲 속에서 하늘 향해 두 팔 벌리고 팔짝 뛰어야 사진이 잘 나온다고 얼마나 뛰었는지 기운이 다 빠지고 두통이 올 지경이었다. 우리는 이런 걸 ‘광(狂) 자매 놀이’라 한다.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난다. 비가 올 듯 흐린 날이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다음 장소로 이동한다.
제주의 현무암 지하에서 흐르는 물과 바닷물이 만나 깊은 웅덩이를 형성한 곳 ‘쇠소깍’에서 나룻배와 카약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았다. 근처 바다에서는 파도가 너울을 형성하며 힘차게 하얀 물거품을 토하고 있었다. 바다를 향해 나란히 있는 벤치에 우린 쉬어가기로 했다. 잠시 후 벤치 뒤에서 큰소리로 ’안녕 하수까?’를 시작으로 계속되는 방언이 들렸다. 우린 도대체 알아들을 수 없었다. 환경미화원 아저씨였다. 참으로 기막힌 말씀을 하셨다. “유관순, 안중근 의사는 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리고, 어떤 사람들은 쓰레기를 버린다.” 오래 기억될 것이 예상되는 순간이었다. 물론 우리가 쓰레기를 버렸다는 것은 아니지만…. 유쾌하신 아저씨는 좋은 여행이 되라는 덕담을 하시고 가셨다.
서귀포 시내에 인접한 숙소를 향했다.
짐을 풀고 올레 시장을 둘러보며 저녁도 먹고 숙소에서 먹을 간식도 샀다. 숙소에서 하루를 돌아보며 사진 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우리가 깔깔대며 얼마나 웃었는지 엄마는 “너거들 와그라노.” 하신다. 그래도 우린 박수를 치며 웃는다. 불효녀들이다. 다음에 스마트폰을 사드려서 사진을 보실 수 있게 해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하루를 얼마나 열심히 다녔는지 밤 10시에 있는 월드컵 축구경기도 못 보고 깊은 잠에 들었다.
둘째 날이다.
서귀포 안덕면에 있는 ‘방주 교회’를 갔다. 세계적인 건축가 이타미 준이 노아의 방주를 본 따 만든 성전 건축물이다.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성전에 들어선 순간 그대로 숙연해졌다. 한참을 가슴 먹먹함으로 조용히 기도에 들어갔다. 어제의 광 자매는 모두 경건해졌으며 성전으로부터 느껴지는 충만함에 감사의 마음이 쏟아졌다. 이런 중 산간지역에 성전이 있어 여행객의 마음에 평정심(平靜心)을 주시니 더욱 감사하다. 여기서도 기념사진은 빠질 수 없다. 성전 앞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로 주위를 둘러보니 평안 그 자체였다. 부슬부슬 비도 내렸다. 탁 트인 들녘에 비바람이 조용히 불고 흐린 하늘마저 ‘내 청춘의 멋진 어느 날’ 같은 설렘이었다.
교회를 나와 렌터카에 기름을 넣으려고 주유소를 찾았다. 비바람 부는 산간지역의 허름한 주유소에 도착했다. 영업 중인지 확실치 않아 잠시 기다리니 아저씨가 나왔다. “영업하시나요?” 물으니, 고개를 끄덕이셨다. 아저씨께서 우리에게 ‘열려라 참깨!’라외치면 주유 주입구가 열린다며 농담을 하신다. 그래서 다 같이 외쳤지만 웃음만 나왔다. "아저씨, 안 열리는데요?" "아니, 내가 열려라 참깨 해야 열리지요 보세요 열렸지요?" 하시며 너스레를 떠신다. 어제 만났던 미화원 아저씨가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좋은 추억이 쌓여갔다.
애월읍에 있는 국내 최대 규모인 미디어아트 전시관인 ‘아르떼 뮤지엄’으로 향했다. 입장료가 좀 비쌌지만 다채로운 미디어 전시관에 들어서면서 감탄사는 노래가 된다. 온통 세상이 동백꽃인 영상을 시작으로 제주의 사계절, 대형 폭포전시관을 돌아서니, 초대형 파도가 끊임없이 춤추고, 웅장한 파도소리는 바다 가운데 있는 것 같았다. 이 영상 앞에서 광 자매들은 그냥 지나칠 수 없다. 파도놀이를 했다. 정신 줄을 놓고 영상 속의 파도를 힘껏 타본다. 파도 소리는 우리 광자매 웃음소리도 삼켰다. 특히 고래 한 마리가 대형수족관에 있어 힘차게 요동 칠 때면 와! 외마디의 탄성이 합창이 된다. 엄마도 “참 신기하네. 이리 고래가 나오겠다.” 하신다. 정말 신비로운 기술력이다.
모슬포에는 방어축제로 한창이다.
빠질 수 없는 먹거리다. 회를 좋아하는 둘째 동생은 방어 노래를 부른다. 방어의 월동지가 마라도 인근이다. 모슬포가 주산지가 된다. 식당은 이미 만석이다. 웨이팅 후 우린 겨우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방어회, 회무침, 갈치조림, 비빔회국수가 차례로 나왔다. 가성비 있는 맛집은 소문대로였다. 엄마는 “아까운 회 남기지 말고 다 먹어라.” 하신다. 코에서 방어냄새가 나도록 먹은 것 같다.
식사 후 아담한 모슬포항에 부는 바람도 시원했다. 이제 뷰가 좋은 곳에서 차 한 잔이 남았다. 검색을 하며 서귀포 방향으로 이동했다. 평일인데도 소문난 카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시야는 온통 바다다. 따뜻한 커피와 조각 케이크로 한 자리 잡아본다. 회색빛 하늘. 시퍼런 바다. 매서운 바람은 ‘여기가 제주도다!’ 말하고 있었다.
참 좋은 시간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런 여행은 삶의 활력소가 분명하다. 여행을 다녀온 후 엄마에게 스마트폰을 선물했다. 원 없이 사진을 보신다. 전화 걸고 받기도 잘하시고 보고 싶은 자녀들 맘껏 보실 수 있다. 혼자 계시지만 외롭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산다는 것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그래도 작은 일에도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면 이 삶 자체가 감사가 된다는 것을 확실히 믿는다. 이 마음이 매일 변치 않기를 간절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