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메민 May 24. 2024

마음껏 까무잡잡할 자유

  어렸을 때부터, 태어난 지 몇 년 되지 않아 새것 같이 희고 뽀송한 아이들 사이에서 나는 독보적으로 구릿빛이었다. 그때의 사진들을 보면 혼자서만 감자밭에서 잔뜩 뒹굴다가 온 아이 같다. 학창 시절엔 '흑인'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피부가 까매서다. 놀랍도록 일차원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이 별명은 중학교 때 같은 반 남자애들이 만들어줬다. 그들은 날 볼 때마다 윤미래의 [검은 행복]을 열창했다.

 

유난히 검었었던 어릴 적 내 살색 사람들은 손가락질해 내  mommy한테.........  하루에 수십 번도 넘게 난 내 얼굴을 씻어내 하얀 비누를 내 눈물에 녹여내 까만 피부를 난 속으로 원망해 why o why세상은 나를 판단해


그들이 BGM을 깔며 내 까만 피부를 열심히 홍보해 준 탓에 난 반에서 까만 애로 통하게 되었다. 시절 좋아했던 남자애는 내게 하얗기만 하면 예쁠 것 같다며 비수를 꽂았다. 까만 피부가 창피해졌다. 하얘지고 싶은 맘에 인터넷에 ‘얼굴 하얘지는 법’을 검색하고 따라 해 봤다. 쌀뜨물로 세수를 하고 비타민 c를 잔뜩 먹고 그래도 되지 않자 때수건으로 얼굴을 밀어봤다. 바르면 얼굴이 엄청 하얘지는 스킨푸드 토마토 선크림을 얼굴이 미끌거리도록 바르기도 했다. 닦고 바르고 무슨 짓을 하던 여전히 까맸다. 


  성인이 되었다. 어른이 되면 하얘진다는 엄마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혼자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고 있으면 태닝 했냐는 질문을 듣는다. 헬스장에는 일부러 태운 사람들이 많아 내 까만 피부가 그리 눈에 띄지는 않지만 가끔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다. 화장을 할 때에는 올리브영에서 제일 어두운 호수의 파운데이션을 바른다. 우리나라에선 대부분 하얀 피부를 좋아하고 하얗게 화장해서 그런지 그렇게 어두운 호수까지 잘 나오지 않아 화장을 하면 얼굴만 하얘져서 동동 뜬 느낌이 난다. 성인이 되면 유치하게 피부색으로 놀리는 사람들이 없을 줄 알았지만 여전히 까만 피부로 은근한 놀림을 받는다. 입사 초반에 친해진 동기는 내가 당시 남자친구와 찍은 사진을 보고 놀려댔다. 

"왜 여자애가 남자친구보다 까맣냐."

 20여 년 동안 까만 피부에 대한 놀림을 받으며 쌓인 부아가 치밀어 올라 나름의 반박을 했다. "하얀 피부만이 미의 기준은 아니지 않나." 

그러자 그는 “그럼 네가 미의 기준이라는 거야?”하며 더 이상 대꾸할 가치를 잃게 만들었다. 


 생김새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시대가 왔지만 사람들의 머릿속에 뿌리 박혀 있는 미의 기준이라는 건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나를 평가의 단상에 세우고 잣대를 들이대며 이건 너의 단점이야,라고 말하는 걸 들으면 화가 가 나다가, 어느새 나도 '단점인가?'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하지만 그의 미의 기준은 그렇다고 받아들이고, 나는 나의 미의 기준으로 날 인정해 주고 싶다. 어릴 적부터 놀림의 대상이 까만 피부를 받아들이기엔 시간이 많이 걸렸다. 지금도 피부색에 완전히 만족한다고는 말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내 탄탄한 살성과 조금 진한 인상이 피부색과 어울리는 편이라는 생각은 한다. 


 하얀 피부는 아름답지만, 까만 피부도 단점이 아니라 나름의 매력이 있다. 가끔 만나는 몇몇 사람들이 까만 내 피부가 매력적이라고 말해 줄 때, 어렸을 때보단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고 있단 게 느껴진다. 마음껏 까무잡잡할 자유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생겨먹건 저렇게 생겨먹건, 평가하는 사람들이 없는 시대가 올까? 





작가의 이전글 올리브 포카치아 몇 개 남았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