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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영 Aug 17. 2023

2023년 아르코창작기금선정작
-나의 단어, 수호자에게

2

*


   창문을 열자 종에 매달린 물고기가 막대 사이를 날기 시작했다. 속이 빈 금속끼리 부딪히는 소리는 투명하게 쨍쨍거렸다. 형인은 살짝만 건드려도 툭 터질 것 같은 표정으로 통화 중이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알겠습니다. 선생님, 일단 해보고 연락드릴게요.”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형인이 말했다. “지금 애들한테 전화해서 옮기라고 말하래. 살려야 할 거 아니냐고.”


   “지시에 가까웠어?”


   “명령과 지시 중에 뭐가 더 강한 말이지? 아니, 부탁해야 하는 거 아냐? 솔직히 말해서 폐강돼도 상관없는데, 나는. 내 강의도 아니고…, 삼십 분만 있으면 퇴근이잖아. 금요일 오후에 뭐 하는 짓이니.” 말을 그렇게 하면서도 형인은 수화기를 들고 숫자 버튼을 눌렀다.


   수강생이 열 명 이하면 폐강해야 하는데 아슬아슬한 강의가 일곱 개였다. 해당 분반 강사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고 덩달아 담당 과목 조교인 형인도 바빠졌다. 최대 인원을 채운 분반 신청자들을 위기에 처한 반으로 옮겨가게끔 유도하는 게 형인이 해야 할 일이었다. ‘통합적 사고와 작문’은 1학년을 위한 강의이고, 34분반은 체대 대상이니 경영대 3학년은 다른 분반으로 가야 한다, 시스템상수강 신청은 가능하지만 재수강 등의 사유로 뒤늦게 듣거나 전공별로 배정된 분반에 본인 전공이 해당하지 않는 경우 수강 불가가 원칙이다, 이는 국문과 내규니 옮겨 달라. 형인은 부탁과 강권이 묘하게 섞인 말투로 이동을 권했지만 신통치 않은 듯했다.


   “뭐? 알겠어요?” 통화를 마친 형인의 목소리에 불쾌함이 가득했다. 수화기 너머 학생이 짜증 섞인 말투로, 거기에 ‘겠’을 조금 높고 세게 발음한 듯했다. 형인의 책상 위에 놓인 종이를 내 앞으로 가져왔다. 번호 몇 개를 옮겨 적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해졌다. 숫자 버튼을 누르는데 심장이 쿵쾅거렸다. 옛말은 틀렸다. 고통은 나눌수록 배가 될 뿐이었다. 누구는 알바 중이니 두 시간 후에나 통화가 가능하다고 했고, 툭 끊고는 아예 받지 않는 이도 있었다. 감정 소모를 몇 차례 더 하고, 국문과 사무실이니 연락 달라는 문자메시지도 서너 번 발송한 후 마지막으로 통화할 번호를 꼭꼭 눌렀다. 상대는 빠르게 전화를 받았고 나는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그럼에도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로 분반을 옮겨달라고 요청했다. 곧장 상대의 일목요연한 입장 정리가 이어졌다.


   “제가 사 학년이긴 하지만 편입생이고 재수강도 아니거든요. 그래서 일 학년과 동등한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편입생이라면 삼 학년 때 들었어야 했지 않았나요?”


   “저기요, 제가 삼 학년 때 듣던, 사 학년 때 듣던 그쪽이 무슨 상관인데요? 그쪽이 뭔데요? 무슨 자격으로 전화한 거냐고요.”


   열 개의 전화번호 아래 적어둔 조윤정, 편입, 재수강에 동그라미를 그리던 손이, 듣던을 듣든으로 고치던 손이 멈췄다. 눈으로 책상 한쪽에 밀쳐놓은 친절 교육 자료집을 찾았다. 전화 응대는 친절하게 하라, 당신이 학교의 얼굴이다!를 높은 톤으로 강조하던 강사를 떠올리며 크게 숨을 들이켰으나 입을 떼는 건 쉽지 않았다.


   “…선생님께서 직접 학생에게 연락하라고 하셨어요. 선생님 말씀이고, 저희는 상황을 정리해야 해서요. 안 그러면 저희도 어렵습니다.”


   “그쪽 사정이고요. 인원 적은 반으로 가서 학점 안 나오면 책임질 거예요? 근데 진짜 교수도 아니잖아요. 전임도 아니고. 17분반 최나라 강사님 지난달에 졸업하고 강의 맡은 거던데 그럼 시간강사라는 뜻이니까요. 암튼 월요일에 학적과나 교무처에 전화해볼 건데….”


   “듣고 싶은 수업을 들어요, 그럼.”


   “아, 짜증 나. 그럼 왜 옮기라고 그랬어요? 이딴 대접받으려고 비싼 등록금 내고 학교 다니는 거 아니거든요. 위에 전화하기 전에 똑바로 하시죠.”


   나는 순간 흙먼지가 흩날리는 운동장에 떨어진 듯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번외 경기를 뛰는 선수, 게다가 이름표마저 없는 선수, 평생 천연 잔디 구장에서 뛰지 못할 선수, 그런 존재가 된 기분이었다. “쟤 그쪽이랬지? 야, 여기서 박사과정 수료한 선배거든.” 옆에서 통화하는 소리를 들었는지 형인이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를 높였다. 씩씩거리던 형인은 이름과 전화번호, 메일 주소를 가지고 구글에서 조윤정의 트위터를 찾아냈다. 그를 내버려 두고 창밖을 바라봤다. 어느새 목련나무 주위로 어둠이 내려앉았다. 바람결에 고요히 흔들리는 풍경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조금만 더 버티자. 대충 버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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