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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현주 Oct 31. 2023

지구 여행 가이드 해랑

5

  다음 날 남우를 만나러 가는 길에 T에게 경고하는 걸 잊지 않았다.

  “자기 정체를 들키지 않게 조심하세요. 인간이 알면 안 됩니다.”

  “알아요. 여행객의 규칙이죠. 그래도 진짜 인간하고 교류해 보고 싶었어요. 이걸 뭐라고 하더라? 맞다! 우정이라고 하죠?”

  진짜 인간……. 이 말이 왜 귀에 거슬리는지 모르겠다. 뭔가 울컥하는 게 그럼 나는 뭔가 싶었다. T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진짜와 가짜 사이에는 가늠할 수 없는 깊은 강이 흐르는 것 같았다. 아니면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일지도. 지구에서 살아왔고 앞으로도 계속 살아갈 나는 이곳에서 여전히 외계인일 뿐이었다. 만약 나중에 내 아이가 태어나도 그대로 외계인일까? 솔직히 지구에 오기 전에 있던 행성도 진짜 고향은 아니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로 쭉 거슬러 올라가 봐도 우리는 언제나 여러 행성을 돌아다녔다. 나도 언젠가는 지구가 아닌 또 다른 행성으로 떠나버릴지 몰랐다.

  “당신은 우정을 나누는 인간이 있나요?”

  T의 질문에 갑자기 머릿속이 멍해졌다. 인간과의 우정이라고? 코웃음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가끔 오는 여행객들이 가지는 로망이었다. 곧 떠날 여행객에게 진짜 현실을 구구절절 말해줄 필요는 없었다. 인간은 우정보다 의심의 눈초리를 먼저 보냈다. 돈을 낼 수 있는지, 도망치지는 않을지, 무슨 일을 벌이지는 않을지. 돈을 잘 내고 얌전히 있어도 나를 가만히 지켜보는 눈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나는 T를 보며 고객이 즐거운 여행이었다고 생각하고 가면 최고라고 한 할아버지의 말씀을 되새겼다.

  “당신은 인간과의 우정을 체험하면 좋겠네요.”

  어제 왔던 공원 입구에서 남우가 팔을 흔들며 반가워했다. T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우에게 달려갔다. 남우는 좋은 건지 무서운 건지 모르겠는 표정으로 무릎을 구부리고 T를 받아냈다. 어제처럼 엉덩방아를 찧지는 않았지만 T의 힘에 식은땀을 흘리며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정말로 괜찮겠어? 무리하지 말고.”

  남우에게 걱정스럽게 물어보면서 몸이 힘들면서도 저렇게까지 하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괴, 괜찮아요. 같이 한 바퀴 돌고 올게요.”

  남우는 T의 목줄을 잡고 공원의 산책로를 걷기 시작했다.

  나도 그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햇빛이 너무 찬란해서 눈을 온전히 뜨고 있기가 힘들었다. 가이드를 하면서 이런 여유를 부리는 건 처음이었다. 누군가가 내 일을 대신해 주다니. 그것도 인간이.

  남우는 나무 그늘에 자리를 잡고 T와 놀고 있었다. T는 발라당 누워서 배를 내보였다. 저 자세를 어떻게 아는 건지 신기했다. 아니면 개가 되면 나오는 본능적인 자세인 걸까? T가 엉덩이를 흔들며 좋아하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옆에 있는 벤치에 앉아 그들이 즐겁게 노는 걸 지켜봤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러다 T를 만지는 남우의 손등이 눈에 들어왔다. 붉은 게 우둘투둘 나 있었다.

  “이게 뭐야? 이것도 털 알레르기지? 인제 그만 만져.”

  나는 남우의 손등을 확인하고 T를 다른 곳으로 보냈다. T는 남우의 손등을 보고 낑낑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자기도 미안한 모양이었다.

  “진짜 괜찮아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남우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너 바보야? 자기 몸을 왜 이리 함부로 다뤄?”

  “개들이 좋으니까요. 내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요. 개들은 나만 바라보고 그냥 무한한 사랑을 줘요. 내 탓이라고 하면서 상대방한테 어떻게든 나를 떠넘기려고 싸우지도 않는다고요. 아씨, 진짜!”

  남우가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갑자기 남우가 우는 모습에 당황스러워 주변을 살폈다. 남우의 팔을 끌어와 벤치에 앉혔다. 남우가 진정될 때까지 옆에서 가만히 기다렸다. T는 남우가 걱정스러운지 무릎에 얼굴을 갖다 댔다. 남우를 생각하면 T를 떼어내야 했다. 하지만 남우가 T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를 받는 것 같아 내버려 뒀다.

  “죄송해요. 요즘 집에 일이 많아서.”

  “아냐. 티랑 놀아줘서 고마워. 엄청 좋아하더라. 그래도 자기 몸을 좀 아껴. 무리하지 말고.”

  “네. 그럼…….”

  남우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몇 번이나 뒤돌아보며 T와 인사를 나눴다. T도 당장이라도 뒤쫓아갈 듯이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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