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룻물 이진희 글그림 고래뱃속출판
동트기 전에 아버지는 아들을 깨워 산에 오른다. 인기척에 놀란 학이 하늘로 솟아 오른다. 학을 신기한 듯 쳐다보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말한다. "그림장이는 눈이 붓이야. 눈이 머무른 곳이 곧 붓이 가는 길이지." 옹달샘까지 가는 길에 부자는 소나무, 바위, 거북이, 영지, 사슴을 본다. "물이라면 가까운 우물에서 떠도 되잖아요." 아들의 물음에 아버지는 새벽에 옹달샘 물을 떠다가 자식들의 건강과 복을 기원하고 그 물로 미역국을 끓여주시던 어머니를 기억한다. 일출을 보고 내려오면서 아버지는 말한다. "산은 모든 것을 내어 준다. 우리는 그것을 종이 위에 노닐게 하면 되는거야."
집에 돌아온 아들은 떠온 샘물로 먹을 간다. 칠흑같이 어둡고 찰진 먹물이 우러나온다. "선이 소박하다하여 그 화가의 생각이 소박한 것은 아니다." 아버지는 새벽 산행에서 보고 느낀 것으로 장생도를 그리고 있던 것이다.
현대의 생활은 빠름과 편리함을 추구하여 예전의 소망과 정성을 잊어가고 있는 듯 하다. 외할머니께서 살아계실 적에 대학에 합격한 나를 보고 축하한다라는 말보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반복하셨던 것이 기억난다. 당시에 누구에게 감사하시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섭섭하기까지 했다. 종교나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누군가의 소망과 정성으로 은혜를 받는 듯하다. 심지어 불행까지도 더 안좋은 상황으로 될 수도 있었다는 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