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돌이 아닌 주위의 작은 돌과 흙을 보는 힘
책을 읽고 주5회씩 필사를 하는 온라인 필사 모임에 들어와 필사를 다시 시작한지 3주가 되었습니다. 필사의 양과 내용은 자율로 저마다 읽고 쓴 부분을 찍어 단톡방에 올리기만 할 뿐 별 대화는 없는 온라인 모임이지요. 제가 처음 필사를 시작한 책은 '쇼펜하우어 아포리즘: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로 당신께서 제게 누누히 말씀하시는 필체를 교정하고자 필사 모임을 참여하였습니다.
그 후로 두번째 책인 김창완님의 에세이 '찌그러져도 동그마리입니다.' 에도 필사 모임을 참석하였는데 그 때는 필사는 커녕 그 책을 읽지조차 않더군요. 제 삶이 바빠지고 힘들어지면서 책은 점차 멀어져갔고 하루하루 숨막히게 살아가며 저 스스로를 놓치며 인생의 방향을 잃고야 말았습니다. 영혼 마저 잃어버린 제 삶의 구원이 필요했고 다시금 방향성을 잡기 위해 책이라도 읽어야 살겠다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이미 떨어져 버린 제 마음이 스스로 책을 들기엔 한없이 약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던 와중 온라인 필사 모임이 재시작하니 함께 하자는 모임장님의 연락을 받고 '그래, 다시 써보자.' 라는 마음을 먹고 필사를 다시 시작 하게 되었던 거죠. 이번에 필사하는 책은 우승희 작가님의 '어른의 새벽' 이라는 책으로 책의 부제처럼 하루 한문장씩 50일간 고전을 읽는 내용이였습니다. 어릴적 당신께서 사주신 동양 고전철학들을 읽어 보았지만 저는 동양의 고전철학들은 비현실적 낙관주의자들이 쓴 말로 치부해 그 이후로 열어보지도 않던터라 거부감이 들기도 했지만 다시 책 읽는 환경을 만들기 위함이 컸기에 책을 주문하고 필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10대에 읽은 어린왕자와 20대에 읽은 어린왕자, 30대에 읽은 어린왕자 모두 다 다르다고 하듯이 이번에 읽는 고전철학은 제게 상당히 큰 울림으로 다가왔고 그 고전 철학 문장들의 느낀점과 부연 설명이 담긴 우승희 작가님의 메세지 또한 제가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중 지금 제 상황에 너무나도 고마운 문장이 있어 당신께도 공유하고자 편지에 적습니다.
p.62 -글쓰기는 나를 아끼는 최고의 방법이다-
'최고의 문장은 남다른 기교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쓰고자 하는 내용에 꼭 맞게 할 뿐이다.'
<채근담>
글쓰기는 특별한 재주가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을 정도가 되는 것이 글쓰기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아는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마음에 있는 것이 그대로 글에 드러나게 할 수 있다면 좋은 글이라 정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글은 생각을 표현하지만, 글이 생각을 다듬어주기도 한다. 쓰다보면 마음이 정리되기도 하고, 생각지 못했던 마음이 불쑥 튀어나오기도 한다. 나에 대한 가장 심도 있는 대화는 타인에게 내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을 적어보는 것이었다. 생각을 마음에 담아두기만 하는 것과 글로 꺼내는 것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어렴풋이 느끼고 있는 감정이 분명한 언어로 바뀌는 과정에서 마음이 해소되고 정화된다. 불안이든, 걱정이든, 아니면 기쁨이든 일단 쓰기 시작하면 감정이 누그러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글을 쓰기 전에 나는 내 생각을 그렇게 중시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쓰는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나의 생각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고 여겨진다. 그러니 내 글이 아무리 부끄럽게 느껴진다고 하더라도 글쓰기는 나를 아끼는 최고의 방법임에 틀림없다.
글쓰기는 나를 아끼는 최고의 방법임에 틀림없다.
요 며칠 당신에게 편지로 제 마음 속 느낀점들을 적었다고 그래서 그런지 전보다 마음이 편해지고 홀가분해진게 느껴집니다. 쉴 새 없이 떠들어 대는 제 마음속 소리 때문에 항상 불안하고 무기력함이 동반 되었는데 그 소리들을 분명한 언어로 정리해 놓고 보니 그 소리에 빠지지 않고 그저 바라 볼 수 있는 힘도 생겼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저는 더할나위 없이 저를 아껴주고 저에게 시간을 쏟는것 같아 하루가 힘들어도 그 하루를 제게 쓴것 같습니다.
p.76 -나와의 약속을 지키면 자신감이 생긴다.-
"작은 믿음이 이루어져야 큰 믿음이 세워진다." <한비자>
상앙商鞅은 물건을 옮기면 상을 주겠다는 쉬운 방법을 써서 최초로 '법法'의 의미를 알렸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비자는 법에 대한 믿음을 키우려면 작은 약속부터 실천해야 한다고 말한다. 작은 약속들이 지켜지면 법에 대한 신뢰가 생기고 비로소 나라가 안정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큰 믿음은 단번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주위의 작은 돌과 흙을 치워야 비로소 큰 돌을 옮길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지는 것처럼 반드시 작은 믿음이 축척되어야 큰 믿음이 세워진다.
나 자신과 한 사소한 약속들을 쉽게 어기면서 자신감을 잃었던 때가 있다. 그때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어디부터 어떻게 쌓아올려야 하는지 몰랐다. 그래서 무엇이든 지킬 수 있는 약속을 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 약속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아주 티끌 같은 약속일지라도 지켜내면서 나 자신을 향한 불신이 조금씩 허물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나를 믿는 것은 전혀 해가 되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언제나 믿지 않는 쪽보다 믿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 더 낫다. 그리고 믿기 위해서는 나를 믿을 수 있는 일을 지속해야 한다. 단번에 생겨나는 믿음은 없기 때문이다. 법이라는 것도 작은 약속에서 신뢰를 쌓아가는 것처럼 나와의 사소한 약속을 지키다 보면 어느새 스스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생길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한 노력을 지속하지 않으면 예상치 못한 곳에서 또다시 스스로를 부정하고 가로막는 나와 만나게 될 것이다.
주위의 작은 돌과 흙을 치워야 비로소 큰 돌을 옮길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지는 것처럼 반드시 작은 믿음이 축척되어야 큰 믿음이 세워진다.
아 저는 지금까지 제 삶에 있어 큰 돌과 주위의 작은 돌을 구분조차 하지 못했던것 같습니다. 가령 책을 읽고 필사를 해야 하는 일이 큰 돌이였다면 저는 하루하루 읽는것이 작은 돌이고 그 작은 돌들을 매일같이 습관화 시키면 큰 돌을 옮길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큰 착각이였더라고요. 가령 저에게 필사라는 큰 돌을 치우기 위해서는 주변의 작은 돌인 집에 도착하면 핸드폰 집어 넣기가 있었던 것이였고 새벽 수업을 마치고 오전 운동을 하는 큰 돌을 치우기 위해서는 수업 후 10분만이라며 눕지 않기같은 작은 돌을 치워야 했는데 큰돌을 매일같이 옮기면 큰 돌 을 옮길 수 있을거라 생각했습니다.
요근래 저를 짊어지는 삶의 무게들로 한없이 낮아진 자존감에 사람들을 만날 때 마다 움크러 드는 제 자신을 알기에 이런 모습을 바꾸고자 저는 제 외부의 요인들을 바꾸려고 노력했습니다. 외부의 요인들은 쉽사리 바뀌지 않았고 설사 바뀐다 하더라도 그 순간 뿐 제 자존감은 다시 곧 낮아졌습니다. 저는 제 자신을 믿기 위해서 이제부터라도 제 주변의 작은 흙과 돌들을 치워 저에게 믿음을 주고 저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주려 합니다.
아직까지 저는 이런 삶을 바라보는 제가 아닌 이런 삶을 사는 제 환경들이 바뀌길 바라는 마음이 크기만 합니다. 이런 저를 스스로 아끼고 온전히 믿어주고 싶습니다. 순풍이 불어 제가 타고 있는 배가 앞으로 훨훨 나아가 보다 빠른 속도로 다른 배들을 따라잡고 싶은 마음이 들겠지만 바람이 불지 않아도 때론 역풍이 불어와 저의 배가 방향을 잃고 다른 길로 잘못 들어선다 하더라도 저는 제 배의 노를 젓는 저를 믿어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제 삶의 바다가 제 배를 어찌하여도 저의 노질은 언제나 저의 의지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