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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조 Oct 29. 2024

나의 외할머니

내 마음의 쉴 곳은 고요함 속으로, 그럼에도..

 지난 주말 남편의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남편은 대회와 합숙일정으로 타지에 있어 오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아이 셋을 데리고 장례식장에 이틀간 다녀왔다. 장례식장에서 문상객을 받는 동안 아이들과 자리를 지키며 하루를 보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시할머니를 모신 운구차가 향한 곳은 공교롭게도 나의 외할머니가 모셔진 추모공원이었다. 그 날은 하늘이 어둡고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9월 추석이 지나자마자 외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르느라 나는 추모공원에서의 절차를 잘 알고 있었다. 처음과 달리 꽤 여유로운 마음으로 아이들을 챙기며 할머니께 인사를 올리고 보내드렸다.


 시부모님이 이혼하신지는 꽤 오래됐다. 시어머니와는 시누이도 같이 살고 있고 해서 다 같이 만나 잦은 왕래를 하지만, 시아버지와는 추석,설 명절을 제외하고는 왕래가 드물다. 그래서 시할머니도 결혼 당시 첫째를 임신하고, 출산 후 둘째 아들을 낳았을 쯤 명절엔가 .. 다 해야 서너번 뵀을 뿐이라 어떤 추억도 감정도 거의 없기 때문에 장례를 치르는 동안 어떤 감정은 그닥 들지 않았다. 그저 분위기나 자리가 어렵고 불편하다는 기분이 좀 들었을 뿐이다. 추모공원에서도 별다른 감정이 들지는 않았다. 장의업체에 소속된 장례지도사가 추모공원에 동행하여 절차나 진행과정 등을 설명하고 진행해주시는데, 화장을 하기 전 관망실로 가족을 부른다.

 시할머니를 화장하기 전 관망실에 가족과 친족들이 모여있을 때, 불현듯 외할머니 장례식 때가 생각이 났다. 외할머니 장례 때 장례지도사가 설명하길, 화장을 하면서 죽은 몸에서 영혼이 완전히 빠져나간다며, '뜨거우니까 얼른 나오세요~'와 같은 말을 하라고 지도하셨던 그 날의 기억이 차 올라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할머니, 뜨거우니까 얼른 나오세요~ 할머니 얼른 나오세요~"라고 울부짖던 내 목소리와 화장하러 멀어져간 할머니의 관이 떠올랐다. 하지만 다른 분의 임종 앞에 그런 내색을 할 수 없어 서둘러 마음을 수습했다.

 화장이 되는 동안 가족, 친지들은 아침 식사를 하고, 2시간 가량의 기다림이 시작된다. 그렇게 각자의 가족 중 누군가의 장례를 치르러 간 많은 분들이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온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다들 대기실 의자에 앉아 쉬거나 오랫만에 뵌 친지들, 지인들과 서로 이야기를 나누거나 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2시간 가량 화장을 기다리고 화장이 끝나면 추모의 집으로 향해 마지막 인사를 한다.

 그렇게 장례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이런저런 생각이 떠다니다 그냥 머리가 아파졌다. 만사가 귀찮아졌다. 그리고 이틀간 지독한 편두통으로 너무 괴로웠다.


 9월 추석이 지나자마자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여러 가족들 사정에 의해, 아니면 핑계로.. 대략 2년 가량 뵙지 못한 채 떠나보낸 할머니의 죽음 앞에 죄송함과 그리움에 슬픔이 가득 차 올랐다. 빈소에서 뵌 외할머니 사진을 봤을 때 마음이 찌르르 하더니, 안치실에서 할머니의 싸늘한 시신을 마주하고, 울할머니 떠나는 길에 입은 수의를 매만지는 내내 울음을 참으려 했지만 참을 수 없는 울음이 터져나왔다. '할머니 잘가요, 할머니 더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해요, 할머니 보고 싶었는데,, 할머니 감사해요, 할머니 사랑해요, 할머니 좀 더 살갑게 다가가서 이런 말 저런 말 쪼르르 살갑게 살랑댈 걸.. 무뚝뚝한 손녀라 미안해.. 할머니 보고싶어..보러 안가서 넘 미안해...보고싶었는데...' 갖갖은 말이 마음에 꽂혀 맴돌았다.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날부터 한 열흘을 정신차리기 어려웠던 것 같다.


  되뇌어도 알 수 없는 마음이었다. 죽음에 대한 막연한 헛헛함 때문일까, 죄송함 때문일까, 그리움 때문일까? 할머니를 향한 마음일까 나를 향한 이기적인 마음일까? 나의 마음을 잘 읽어낼 수가 없었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냥 막연히 슬픈 기분이 지속됐다.

 그러다 또 사는대로 살아가야니 늘 그랬듯 아이들을 챙기며 나는 또 나의 날을 살아야지라며 그냥 추스려진 것 같았다. 그런데 시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외할머니가 모셔진 같은 추모공원에 갔다 오니 또 마음이 어지러웠다. 한달만이라 외할머니가 모셔진 곳 바로 옆 호실이어서 간 김에 외할머니도 또 뵙고 왔다.


 나는 외할머니를 참 좋아한다. 조용한 할머니를 보고 어릴 때부터 속으로 생각했다. 그 옛날 분들 중에 정말 우리 할머니 같은 분은 없다고, 우리 외할머니를 시어머니로 둔 숙모들은 왠지 복 받은 거라며 아주 어린나이에도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본 시어머니의 모습은 엄마의 시어머니이자 나의 아버지 모친인 분인데, 그 분은 정말 손녀인 나에게 조차 싫은 마음을 내비치며 본체만체 하시며 잘 왔다는 말 한번 한적없이 왜 왔냐는 말이나 하는 분이었고, 특히 엄마에게 싫은 내색을 쉽게 하고 말도 아무렇게나 하는 그런 분이라 더 그랬던 것 같다.

 우리 할머니는 싫은 게 있어도 좋은 게 있어도 어떤 동요 없이 괜찮다, 고맙다는 말도 조용히 하시던, 조용한 분이었다.

 갓 돌이 지났을 때였댔나..? 엄마는 나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아 큰 외삼촌이 시작한 식당을 같이 하며 먹고 살기 위해 엄마의 고향으로 돌아가 그 곳에 터를 잡고 나를 키우셨다. 지금 나의 고향은 엄마의 고향이다.

 그 때 엄마도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해야했기 때문에 외할머니집에 나를 맡기고 식당을 하셨다. 외할머니는 동네 길고양이들이며 강아지들을 작은 점빵에 키우며 나를 같이 키우셨다고 한다.

  나는 야옹야옹거리는 새끼 고양이들과 낑낑거리는 강아지들 사이에서 자란 그 분의  첫 외손녀딸이다. 할머니집에서 아기 때 크다가 유아기가 지나면서 엄마는 나를 집에 줄곧 혼자 두고 일을 하러 가셨다. 그 시절엔 어쩔 수 없었을테고, 그런 집이 많았다는 걸 안다. 그런데  아이들이 이상인 집이 대부분이지 나처럼 외동이 흔하지 않은 때였다. 나는 네,다섯살에도 조용히 혼자 집을 지켰고, 여섯살, 일곱.열 아홉살까지 줄곧 혼자 집을 지키며 자랐다.

 집에 혼자 있거나 식당에 가 있거나 아니면 외할머니가 하는 점빵에 가 있었다. 우리 집에는 많은 일이 있었다. 그리고 나의 외가에는 삼촌 둘과 외할아버지가 몇 년에 한번 꼴로 돌아가시는 우환이 계속 들었고, 외할머니도 엄마도 힘든 시간을 보냈으리라.. 그 때는 내가 어린 나이라 처음 막내 외삼촌의 장례를 치르고도 뭣 모르고 컸던 것 같다. 다만 막내 삼촌과는 더 이상 함께 할 수도, 추억을 꺼낼 수도 없어짐에 그리움과 슬픔이 얕게 드리워졌을 뿐.

 고등학생 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큰 외삼촌의 암 소식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부모님 사이가 좋지 않아 아버지의 부재가 줄곧 있었던 내게 외가의 사랑은 너무나 각별히 느껴졌고, 특히 큰 외삼촌은 매일 엄마와 식당에서 보며 마치 아버지같이 든든하니 엄마와 나에게 큰 힘이 되는 분이셨기 때문이다. 그러다 스물한살에 내가 도망치듯 떠난 외국에서 큰 외삼촌의 임종소식을 뒤늦게 전해들었다. 우울함이 극도로 차올랐다. 엄마가 힘겹게 보내주고 있던 학비와 생활비에 대해서도 걱정이 크던 나는 그 소식을 접한 후 한동안 힘들었는데, 그러다 여러가지를 핑계로 중퇴를 하고 귀국했다. 물론 시간이 지나 가장 좋았던 기억과 후회스러운 기억이 혼재했던 나에게 뜻깊고도 큰 경험을 했던 유학이었다. 그렇게 돌아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답답함과 여러가지에 환멸을 느끼며 또 도망치듯 서울로 떠났다. 잘 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서울살이도 녹록치 않았고, 그 때 나는 자유로운듯 했지만 사실상 꽤 많은 고생을 하고 엄마의 성화에 못 이기는 척, 어릴적 남자친구였던 그에게서 도망칠 핑계로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돌아온 내게 엄마의 따뜻함은 아주 잠시, 따가운 시선과 못 미더운 딸에 대한 비난조의 잔소리로 또 나는 계획해 하던 공부를 멈추고 원치 않던 직장에 급히 취직을 했다.

 나는 자라며 줄곧 착한아이 컴플렉스와 삐뚤어지고 싶은 욕망 덩어리 사이에서 혼란스러웠다. 늘 나를 키우느라 애쓰는 엄마의 고생에 감사함은 갚지 못하는  미안함과 죄스러운 마음으로 커져갔고, 꼭 갚아드려야 한다는 압박에 마음이 늘 무겁고 지쳤다. 뭐 하나 똑부러지게 이룬게 없이 전전긍긍 하던 내가 나도 너무 답답했는데, 딸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는 엄마는 오죽했을까 싶다.

 

 엄마는 잔소리와 지시가 굉장히 많은 분이라 외동딸인 나는 그 많은 부름을 듣고 살았다. 남편과도 관계가 좋지 않은 엄마에게 나는 엄마의 걱정거리이자 기대와 자랑이기도 한 걱정많은 기댈목 같은 그런 하나뿐인 딸이었기에 어린 시절에는 엄마가 늘 좋으면서도 미안하기도 하고, 불같은 엄마가 무섭기도 하고, 불쌍한 엄마가 안쓰럽기도 했다. 그래서 10대 중반까지는 대부분 착한 딸로 엄마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던 것 같다. 그것도 10대 후반이 되면서 점차 반감이 심해지고 나를 아는 사람들로부터 최대한 멀어지고 싶어 발버둥치기 시작했지만 말이다. 10대에 나는 억눌린 채 옳은 방황을 하지 못하고

20대에 나는 꽤 방황을 했다. 그것도 5년을 넘기지 못하고 엄마의 부름으로, 또 어떤 자의와 타의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30대에 준비없이 엄마가 된 이후에 나는 더 힘들어했다.

 방황을 했던 때에도, 노력을 했던 때에도, 엄마가 된 30대 이후에도 여전히 엄마의 지나친 부정적인 잔소리와 비난은 멈추지 않았다. 그로 인해 많이 대들고, 싸우고, 울며 부탁도 하길 반복했지만 엄마의 스타일은 크게 바뀌지는 않았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도 내게 필요한건 그저 조용하고도 따뜻한 위로와 마음을 어루어 만져주는 대화, 격려의 말이면 난 더 잘 할 마음이 솟았을텐데... 내가 원하고 필요하던 위로는 늘 받지 못했다.


  외할머니집에 가면 늘 고요했다.  

 할머니는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조용히 계셨다. 그 고요함이 위로가 될 때가 많았다. 엄마가 원하던 그.놈의 결과가 없어 나는 늘 실패하고 잘못한 것만 같아 위축됐던 마음이 우리 할머니집에서 만큼은 그냥 괜찮아졌다.

 그런 할머니 집에서의 고요함은 평가의 눈초리나 비아냥이 없이 그냥 나를 온전히 받아주는 것 같아 드넓은 태초의 품 같았다.



 30대가 되고 아이들을 낳고 키우면서 문득문득 할머니의 마음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 당시 아마 30대 후반 쯤 됐던 막내 아들을 먼저 보내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아 할머니에게도 큰 버팀목이었을 큰 아들을 또 다시 보낸 할머니의 마음을 떠올리면 참 슬펐다. 이전에도 조용하셨던 분이지만 점점 더 말씀이 없어진 이유는 아마도 자식의 죽음 앞에 못내 내색하지도 못하는 어머니로서의 슬픔이 가득해서였지 않았을까.. 하면 너무나  먹먹해진다.

 조용히 곁에서 품어주던 나의 할머니..


 결혼을 하고, 가끔 친정에 아이들과 가는 길이면 할머니댁에도 한번씩 꼭 들렀고, 명절이면  아이들을 데리고 꼭 할머니를 뵈러 갔다. 할머니는 작은 아들내외에게 재산을 다 물려주고서도 계속 낡은 집에 세들어 사셨다.  그게 늘 마음에 걸렸다. 왜 아들집이나 딸집에 같이 사시지 않는지 할머니가 너무 불쌍했다. 아마도 자식들 사는데 불편할까 싶으셨겠지..

 그 낡은 집에서 할머니 혼자 수 년을 사시는 동안 할머니는 어떠셨을까. 아무것도 할머니에게 필요한 것은 없어보였다. 늘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 하셨다. 자식들을 먼저 보낸 어머니에게 필요한건 그 어떤 것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본인의 거처에 아무런 것도 요하지 않으며 그냥 살아가셨던거겠지....

 아들들의 죽음으로 할머니가 본인의 삶이 죄스럽다 여기거나 슬픔만이 가득하진 않았길 바란다.. 하지만 이제와 무슨 마음이겠나 싶다.. 살아계실 때 조금 더 아줌마스럽게 다가가 이런말 저런말 쪼르르쪼르르 거리며 어리광도 피우고 할머니 벗이 되어 드릴 걸...


 아이들을 데리고 가면 할머니는 전에 보지 못한 미소를 지으셨다. 그 모습이 좋아 아이들에게 우리할머니에게 더 다가가 안기라고 종용하기도 했다.  첫째는 부끄러움이 많아 늘 멀찍이 있어도 둘째와 셋째는 할머니에게 안기기도 하고 인사도 잘했다. 그래서 할머니께 내가 못한 효도에 대신하듯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미소를 더 지으실 수 있게 아이들을 더 자주 데리고 찾아뵐걸.. 할머니 미안해..



  지난해에 엄마에게 큰 일이 닥쳤었다. 아빠 때문에 더 이상 힘들일이 없을 것 같았는데, 아빠는 경제적으로 큰 위기를 엄마에게 떠넘겼다. 그리고 그 쯤 할머니가 편찮으시면서 거동이 불편해 엄마집에 할머니를 잠시 모셨었다. 그 때 할머니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할머니는 작은 외삼촌댁에 모시게 되고 그 후로 1년정도, 근 2년을 나의 부모님때문에 힘들어서 나도 이런저런 핑계로 미루다 뵙지 못하다가 임종을 맞게 되었다.  


 어떤 핑계도 같잖았다. 할머니의 임종소식에 그 같잖은 핑계로 할머니를 뵈러 가지 않은 내가 미웠다. 죄스러웠다. 아이들을 보고 싶으셨을텐데.. 아이들도 할머니가 보고싶다고 몇번이나 말했고, 나도 뵙고 싶어서 엄마에게 외삼촌께 가도 되는지 여쭤봐 달라고 했을 뿐, 삼촌께 직접 연락드리지 못했다.  

우리집 일 때문에 삼촌께 면목이 없어서? 아니 그냥 창피해서 연락드리가 어려웠다. 외숙모집이니까.. 또 어려웠다. 그런데 참 그 모든게 같잖은 핑계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며칠은 집에서도 넋놓고 있었다. 매일 맛있게 만드는 밥도 하기 싫었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그냥 있었다. 그 때 다행히 남편이 있어서 힘이 되었다. 많이 힘들었지만 밥을 못 한 날 마다 외식하자거나 배달주문해 아이들 저녁을 대신 챙겨주는 남편에게 고마웠다. 이제는 남편이 날 살펴주는 그런 마음이 힘이 됐다.

 

 그렇게 며칠간 멍하니 지내며 하늘을 바라보며 할머니 잘지내 행복해 ..하다가 어찌 또 일상을 살추스려졌다.  


  한달을 그냥저냥 괜찮은 듯 지내다 시할머니가 외할머니와 같은 추모공원으로 모셔지면서, 화장을 또 보면서.. 또 훅 치고 어지러운 마음이 올라왔다.


 그 슬픔이 어디에서 어디로 왔는지

 또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안다.

할머니는 돌아가셨다는 걸.


오래 오래 사시다 돌아가셨지만,

한 사람으로서, 한 여자로서, 엄마로서

할머니를 들여다봐주지 못해 미안하다.


그리고 안다.


 할머니 곁에서 받는 위로나

 할머니께 드릴 수 있는 기쁨도 이제는 없다.


조용하던 할머니는

그렇게 고요함 속으로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내 마음의 쉴 곳이던 나의 할머니는

고요함 속으로

영원히 사라졌다.


그럼에도 나의 마음에는 할머니가 살아계시다.

조용하고 수줍음 많은 나의 할머니가

여전히  고요하게 나를 위로해 주신다.


나는 할머니를 사랑한다.

나는 할머니에게 받았던 사랑을 기억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나이를 불문하고 슬픈 거였구나.


호상이란건 세속에서나 하는 말이구나..


사랑하는 사람이 아무리 나이 들어도

그런 사람이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참으로 아프고 슬픈거구나..


여자였고, 엄마였고, 할머니였고, 또 나의 아이들에게 증조 할머니였던


나의 외할머니..


이기적이지만 할머니와의 기억을 꾹꾹 눌러 담아 두고 오래 추억할게.

그러면서 나도 부지런히 오늘을 살아갈게..  



슬픔이 나의 마음접시에 넘치지 않게 나를 다독인다.


그리고 나는 나의 그리움이나 슬픔과 관계없이 싱크대에 쌓여 있는 설거지를 하러 간다.

지금 내 할 일을 하는 것 말고 내가 나에게 해줄 것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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