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눈이 떠졌다. 바람 소리 때문이다. 기와지붕이 날아갈 것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다. 무언가 지붕을 치는 소리 또한 예사롭지 않다. 저러다 지붕이 깨어지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된다. 집 앞으로는 넓은 마당이 있어 혹 담이 무너지더라도 괜찮지만 집 바로 뒤에 있는 긴 돌담은 무너지면 집을 덮칠 텐데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다. 이런저런 염려를 하다가 나는 이 집이 바람 많은 제주에서 수십 년 아무 탈 없이 버텨온 집임을 깨닫고 피식 웃음이 나온다. 육지 사람이 겪는 아파트 아닌 제주의 주택 생활의 첫 경험이다. 다시 잠을 청한다. 그러나 잠은 이미 바람과 함께 어디론가 달아나버렸다. 이리저리 뒤척이다 일어났다.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비바람이 태풍급이다. 앞마당과 그 건너편 빈터 사이에 담 대신 대나무들이 촘촘히 심어져 있는데 세찬 비바람에 거의 쓰러질 듯 흔들리며 파도 소리를 내고 있다. 내 잠을 깨운 주범인 지붕 치는 소리는 현관 앞에 심어진 야자나무가 바람에 심하게 흔들리다 지붕과 부딪히며 내는 소리였다. 평소에는 ‘여기가 제주구나’ 하는 느낌을 주는 나무였는데 키 큰 나무가 세차게 흔들리는 것을 보니 으스스했다. 얼굴에 들이치는 비를 맞으면서 나는 제주의 그 소문난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며 한참을 바람 속에 서 있었다. 고향집 뒤에 있는 그 팽나무는 이 세찬 바람 속에서 어떻게 흔들리고 있을까 생각하면서.
오래전 일이다. 내가 제주도에 처음 온 것은 신혼여행 때였다. 제주가 고향인 남편은 제일 먼저 자기가 어릴 때 살던 동네부터 데리고 갔다. 지금은 제주시라고 명칭이 바뀌었지만 북제주군 한경면에 있는 해안가 마을, 집 앞으로는 신작로가 있고 집 뒤로는 수백 년 된 팽나무와 맑은 연못이 있었다. 남편이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이미 부모님이 육지로 나가셨기 때문에 고향집은 다른 사람이 주인이 되어 가게를 하며 살고 있었고, 고향에는 친척 몇 분만이 계셨다. 팽나무가 있는 연못가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돌아온 기억이 선명하다.
남편이 ‘폭낭’ 이라고 부른 팽나무는 아주 잘 생긴 나무였는데 아름드리나무줄기뿐만이 아니라 사방으로 뻗은 가지도 웬만한 큰 나무줄기처럼 굵고 많은 가지와 무성한 잎을 매달고 있었다. 아이들이 나무에 올라가 바람을 가르며 휙 뛰어내리고, 가지를 붙잡고 그 가지가 휘어지도록 그네 타듯이 흔들며 놀았다고 했다. 연못가에는 잠자리가 무척 많았는데 잡은 잠자리 두 날개를 접어 왼손 손가락 사이사이에 한 마리씩 끼고 잠자리 잡으러 뛰어다닌 일, 또 ‘멋물’이라고 불리던 연못에서 수영을 하며 놀았던 일 등을 회상에 잠겨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당시 연못가는 개구쟁이들의 좋은 놀이터였다.
여름이면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마을 사람들의 쉼터가 되기도 하고 잉어도 잡혔다고 하는 연못은 몇 년 전에 갔을 때는 많이 바뀌어 있었다. 연못은 그 폭과 길이가 반으로 줄었지만 연못 위에 다리도 놓였고 연못가에는 정자도 세워졌다. 팽나무 주위에는 평상도 놓고 주위를 잘 정비하여 아름다운 공원으로 꾸며 놓았다. 이제는 개구쟁이들의 떠들고 웃던 웃음소리는 들을 수 없지만 또 다른 아늑함을 느낄 수 있는 장소로 바뀐 것이다. 남편과 나는 똑같은 생각을 했다. 고향집을 다시 찾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나이 들어 다시 고향에 돌아와 그 집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집을 새롭게 단장하여 뒤쪽으로 커다란 창문을 내어 그 잘생긴 나무와 연못을 보며 창가에서 차를 마시는 꿈을 꾸었다.
남편이 하던 일을 다 정리한 요즈음 제주에 내려와 고향집과는 조금 떨어진 집에 머물면서 오래된 골목도 걸어보고 팽나무가 있는 연못가에도 자주 찾아간다. 그 나무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같은 팽나무지만, 언젠가 보았던 제주 출신의 한 화가가 그린 팽나무와는 그 분위기가 무척 다르다. 고향마을이 해안가라 중산간 마을보다 4.3 사건 때 피해를 덜 입어서일까? 응어리지고 할퀸 바람의 흔적이 없다. 화가가 그린 팽나무는 혹독한 바람 한가운데 서서 그 가지와 잎이 한쪽으로 쏠려 으스스하게 흩날리고 있었다. 아마 이 마을도 중산간 마을처럼 그렇게 모진 일을 겪었다면 팽나무 역시 그렇게 흠 없이 훤칠한 모습일 수는 없을 것이다.
지붕이 날아갈까 염려가 될 정도로 심하게 불던 그 세찬 바람도 아침이 되자 언제 그랬던가 싶게 잦아들었다. 하늘은 높고 푸르며, 햇빛은 쨍쨍하다. 밤에 무너질까 걱정했던 돌담을 본다. 구멍 퐁퐁 나게 막 아무렇게나 쌓아 올린 것 같은 오래된 이 돌담도 건재하다. 나는 올레 길을 따라 연못가에 간다. 지난밤 비바람을 잘 견뎠을 폭낭이 보고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