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모자의 죽음

by 권민정

아사(餓死)라고 했다. 먹을 것이 넘쳐나고 영양과잉으로 다이어트가 최대 관심사 중 하나가 된 사회에서 굶주림 끝에 사람이 죽었다. 그것도 40대 엄마와 6세 아들이 함께.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아사’라고 하면 먼저 전쟁이 떠오른다. 서해 유성룡의 『징비록』 중 가장 비참한 장면은 먹을거리가 없어 굶어 죽는 백성들의 모습들이다. 사람이 겪는 죽음 중에서 가장 끔찍하다고 할 수 있는 아사가 전쟁 때도 아닌 1990년 대 북한에서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생기는 참혹한 일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죽은 아기 엄마는 그때를 잘 이겨내고 탈북하여 한국에 온 사람이었다.


집안에 먹을 것이 하나도 없고 돈이 한 푼도 없다 하더라도 문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먹을 것이 지천인 세상 아닌가. 옛말에 사흘 굶어 도둑질 안 하는 사람이 없다고 했는데 왜 그는 훔쳐서라도 먹을 것을 마련하지 못했을까. 아무 식당에라도 들어가서 아기와 함께 배불리 밥을 먹고 돈이 없다고 말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여인은 그런 짓을 하기에는 너무 자존심이 강하고 양심적이었을까. 아니면 문 밖으로 나갈 힘조차 없어서였을까. 그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 불면의 밤을 보냈다.


광화문에 설치된 탈북모자의 임시 분향소에 들렀다. 애도하는 심정보다 그 죽음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의문을 풀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아사한 탈북여성은 부모 형제자매는 물론 친척 하나 없는 외로운 처지에, 아픈 아이와 함께 힘들게 지내며 국가와 주위 누구로부터도 도움을 받지 못했고 철저히 혼자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국적은 한국인이었으나 그녀는 나그네, 환대받지 못한 나그네였다. 아무도 없는 세상에 혼자 버려져 뼛속 깊이 사무치는 외로움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고 바로 그 절망이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탈북모자의 죽음에서 나를 포함한 모두가 죄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통받는 타자에 대한 환대와 배려야말로 근대윤리학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는 프랑스의 현대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나의 집 문을 꽁꽁 걸어두고 타인으로부터 분리된 채 자기 중심주의로 살아가는 것은 책임으로부터의 도피이며 윤리적 의미의 악이라고 말했다. 악과 반대되는 차원은 선을 행하는 일인데 구체적으로 타인의 호소를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것 즉 타인을 영접하는 환대로 나타난다고 했고 또 어떤 얼굴도 빈손으로 문을 닫아놓고 접근할 수는 없다고 했다. 나그네 환대는 긍휼이며 타인의 고통을 나누어 갖는 것이다. 따라서 환대는 자기희생이 전제돼야 한다.


환대에 대해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2015년 9월 초였다. 뮌헨 역 광장에는 조금은 흥분된 듯, 붉게 상기된 사람들이 음식과 음료수 등 먹을 것과 환영 플래카드를 가지고 나와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표정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선한 감정인 연민으로 가득 차 있었다. 드디어 시리아 난민들이 기차에서 내리고 그들은 지금까지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던 환대에 놀라 어리둥절해하다가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즈음 독일에 있었고 마침 그날 뮌헨에 도착해 그 광경을 보았다. 전 세계가 시리아 난민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을 때, 난민들을 자기 영토 안으로 한 발자국도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있을 때 독일의 메르켈 총리는 그들을 합법적으로 받기로 한 것이다. 그 결정에 반대하고 비난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뮌헨의 많은 시민들은 기차를 타고 도착한 난민들에게 이런 사랑을 표현했던 것이다. 그날 뮌헨은 도시 전체가 흥분 상태였던 것 같다. 식당에 가도, 어디에서도 온통 그 이야기가 대화의 중심이었다고 기억된다.


이렇게 시민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데에는 며칠 전 한 아기의 죽음이 있었다. 터키의 남서부 유명휴양지 한 해변에 난민 아기 사체 한 구가 파도에 떠밀려왔다. 해변은 온통 밀려오는 파도가 햇살에 반사되어 은백색으로 빛나고 있었는데 얼굴을 반쯤 모래에 묻고 바닷물을 맞고 있는 아기의 빨강 티셔츠와 청 반바지가 두드러졌다. 3세 된 쿠르디라는 이름을 가진 이 아기. 세계는 마치 아기의 비명을 들은 것처럼, 비명이 그들의 심장에서 소용돌이쳐 늑골아래 쌓임을 느꼈다. 인간의 심연 저 깊은 곳에 있는 여리고 약한 것들에 대한 연민이 깨어 살아나 저릿한 통증을 느꼈다. 그 3살 아기의 빨간 티셔츠와 청 반바지는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는 이미지가 되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안전한 집에서 거주하며 가족과 인생을 향유하기를 원한다. 타인이 내 집에 들어오려고 하면 위협을 느끼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낯선 존재,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는 사람을 집안에 들이는 것은 자신의 존재에 위협을 가하는 것이다. 그 나그네가 때로는 도둑질을 하고 심하게는 성폭력, 살인에 저지르는 세상이라 경계를 게을리할 수가 없는 형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익숙하고 안락한 세계를 열고 위험부담이 있는 낯선 자를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가 있는가. 그 이유는 그 낯선 자가 헐벗고 굶주리고 가난한 자로,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자로 나에게 찾아오기 때문일 것이다.


내 삶이 레비나스가 말한 악보다는 선을 행하며 살아야 될 텐데…. ‘타인을 위한 존재’로 오신 이를 믿고 그를 닮기 원한다고 늘 노래하지만, 정작 희생이라는 단어는 멀리하고 싶은 모순적 존재인 나는, 과연 꽁꽁 걸어둔 내 집 문을 열 수 있을까. 이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생각할수록 그 일은 어려운 일이다. 만일 가능하다면 그것은 내 힘이 아니라 다른 어떤 힘에 의해서 일 것이다.


탈북 모자가 비참하게 죽어간 지도 벌써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세끼 밥을 먹으면서 문득문득 생각나 마음이 아프고, 마트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먹을 것들을 보면 또 가슴이 쓰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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