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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색

풍경 너머를 본다면

by 권민정

제주도 서쪽에 위치한 해안 마을에서 잠시 산 적이 있다. 대문 밖을 나서면 밭들이 펼쳐져 있고, 큰길을 건너면 가까이 바다가 있었다. 새벽에 수탉의 우렁찬 울음소리에 잠을 깨곤 했는데 제주에서도 특히 바람이 센 지역이라 바람 소리에 잠을 깬 적도 많았다. 서울에서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던 습관도 바뀌어 제주에서는 아침 일찍 산책을 나가 올레길을 걷곤 했다. 마을에는 할머니들이 많았는데 그들의 부지런함에 매번 놀랐다. 커다란 모자 위에 세수수건을 걸치고 헐렁한 바지에 낡은 셔츠 차림으로 농사용 엉덩이 방석을 깔고 밭에 앉아 아침 일찍부터 일하고 있는 제주 할망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꾸불꾸불한 밭담과 그 속에서 자라는 작물들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색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는 곳, 현무암 검은 돌과 초록의 조화가 아름다웠다. 비 오는 날 올레를 걷다 보면 평소에는 조금 거무튀튀하게 보이던 현무암이 비에 젖어 새까맣게 윤을 내고, 시원한 빗방울에 식물들은 더욱 싱싱해져 짙은 초록을 띠고 있다. 검은색과 초록의 조화가 더욱 아름다웠다. 나에게 제주의 색은 초록과 검정이다. 사람마다 제주의 색에 대한 이미지는 다르겠지만 유채꽃의 노랑, 바다의 초록과 파랑 때문인지 대체로 초록, 파랑, 노랑이다. 그런데 이번 제주 여행에서 뜻밖의 색을 발견했다. 황갈색이다. 하늘도 바다도 섬도 온통 황토 빛이다.


굵은 줄로 얽은 초가지붕, 태풍으로 쓰러질 듯한 바닷가 주변의 초가, 무너질 것같이 구멍 듬성한 현무암 돌담, 조랑말, 돌담 위에 앉아 있는 까마귀들, 그림 속 풍경은 분명히 제주다. 제주 밖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인데 화폭은 전체가 황갈색으로, 형태는 검은색으로 묘사되어 있는 제주의 풍경들, 서귀포시 기당미술관에서 만난 변시지의 그림이다. 눈부신 태양, 아열대식물의 싱싱한 풍광, 반짝이는 바다, 현란한 색조로 넘실대는 제주에서 어떻게 이런 황갈색의 그림이 나올 수 있을까? 변시지의 그림을 보고 느낀 첫 번째 의문이었다.


그는 20대에 벌써 일본에서 크게 이름을 떨쳤고, 30대에 고국으로 돌아와 서울대 교수가 되었다. 그 후 김환기 등 한국 화가들의 해외 진출 붐이 있을 때 유럽으로 가지 않고 변시지는 고향 제주로 돌아왔다. 6세 때 떠난 제주로 돌아온 것이다. ‘나는 누구이고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의문으로 고민하고, 독창적인 자신만의 그림을 위해 몸부림치다 황갈색과 먹의 색조를 만났다고 한다.


“아열대 태양 빛의 신선한 농도가 극한에 이르면 흰빛도 하얗다 못해 누릿한 황토 빛으로 승화한다. 나이 오십에 제주의 품에 안기면서 섬의 척박한 역사와 수난으로 점철된 섬사람들의 삶에 개안했을 때 나는 제주를 에워싼 바다가 전위적인 황토 빛으로 물들어 감을 체험했다.”


그가 유레카를 외치며 했던 말이다.


한라산이 가까이 보이는 곳에 위치한 기당미술관 2층에는 변시지 그림 25점이 상설 전시되어 있었다. 철사처럼 가늘고 긴 인간 형상을 만들어 ‘걸어가는 사람’을 조각한 자코메티의 조각을 봤을 때와 같은 감동이었다. 자코메티는 전쟁이 남긴 폐허와 상흔, 허무와 불안을 딛고 인간 본연의 실존과 마주하며 뚜벅뚜벅 걷는 형상을 만들었다 자코메티가 더 이상 걷어낼 것 없는 인간 형상을 만들었듯이 변시지 역시 불필요한 것은 지워 나가는 작업을 한 듯하다. 그의 그림은 선과 형태가 아주 단순하다.


20대 일본에서, 30대 서울에서 그린 그의 그림은 제주의 그림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20대에는 인상파적인 화풍으로, 30~40대에는 나뭇잎 하나하나를 세듯 극사실주의 그림을 그렸다. 그의 제주 그림은 후반으로 갈수록 더욱더 잡다한 디테일로부터 초월하여 대상의 정수만을 과감히 표출하고 있다.


변시지의 그림 ‘더불어’와 ‘그리움’을 보면 인간 존재의 고독감, 이상향을 향한 그리움의 정서를 느끼게 된다. 그리움이나 이상향을 향한 그림의 화면 색채는 노랑에 가깝다. 짙은 황갈색 화면의 ‘풍파’, ‘폭풍’ 등의 그림은 제주인의 신산한 역사를 보는 것 같다. 한낮의 태양, 구부정한 한 사내, 쓰러져 가는 초가, 사내와 마주하고 있는 조랑말 한 마리, 소나무 한 그루, 휘몰아치는 바람의 소용돌이, 파도치는 바다에서도 꿋꿋이 떠 있는 작은 조각배 하나, 그의 말대로 척박한 역사와 수난의 섬 제주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에게 산다는 것은 너무 덧없고 허망하다. 인간은 부서질 것같이 연약하다. 그래도 결코 쓰러지지 않게 단단히 굳은 의지를 다져서 걸어가야 한다는 것을 자코메티는 조각에서 표현했다. 예술품 경매사상 1,000억 원이 넘는 값으로 최고가를 경신했던 작품 ‘걸어가는 사람’이 전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유일 것이다.


변시지는 아무리 바람이 불고 풍파가 닥쳐도 끝까지 떠 있는 조각배처럼 끈기와 강인한 생활력을 가진 제주 사람을 표현했다. 그림에는 없지만 나는 제주할망을 보는 듯했고, ‘살암시난 살아져라’하던 할망들의 말도 들리는 듯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살다 보면 살아지더라, 그러니 견디며 살라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 앞에 놓인 풍경은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보인다. 나에게 제주는 오래전에는 신혼여행지로, 요즘은 한 달 살이 혹은 일 년 살이 하는 낭만의 섬이었다. 아름답게만 보이던 제주의 풍경이 화가에게는 이렇게 폭풍과 풍파의 땅으로 보였다. 눈으로만 보던 제주를 그의 그림을 통해 마음의 눈으로 다시 보게 되었다. 제주는 이웃 사람뿐만이 아니라 조랑말까지 친구 되어 더불어 살아가는 순박하고 평화로운 섬이다. 그러나 바람 많고 척박한 자연 속에서 오랫동안 힘겨운 삶을 살았고, 일제강점기에는 특히 일본군에게 강제 노역으로 심하게 혹사당했으며, 해방 후에는 4·3 사건과 같은 수난의 역사를 겪은 섬이다. 변시지의 황토색에서 보듯, 채도 높은 노랑에 가까운 색부터 검은색에 가까운 황갈색까지 제주의 색은 그 폭이 넓고 깊다.


( 2023년 아르코창작지원금 선정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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