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은 생명이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진리를 체험케 하는 스승이다. 예부터 만물의 근원이 흙이라고 말한 이도 있었고, 너는 흙으로 와 흙으로 돌아가리라는 말씀도 있지만 실감하지 못하다가 숲길을 걷는 것이 일상이 된 후 몸으로 깨닫게 된다. 길을 걷는데 바람이 없는 날씨인데도 나뭇잎이 자꾸 떨어졌다. 떨어진 나뭇잎 하나를 주워 들여다보니 물기가 없이 말라있다. 생명체가 물기가 없이 말라간다는 것은 죽어간다는 것이다. 숲길을 걷기 시작했던 초봄, 눈부신 연두로 새로 태어났던 그 잎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의 끝자락이 되자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비록 하나의 잎이 온전한 생명체는 아니지만 나는 하나의 나무가 태어나서 성장하여 활짝 피었다가 소멸하는 것처럼 느껴져 우주의 비밀을 보는 듯 했다.
용인으로 이사 온 지 2년이 지났다. 집 바로 뒤에 광교산이 있지만 자주 가지 않았다. 등산로는 계단으로 시작하여 한참을 가파르게 올라가는 길이라 숨이 차고 힘들다. 그 고비를 지나면 평평하고 걷기 좋은 길이 나오지만 올라가는 처음이 힘들어 내키지 않았다. 부엌 창문에서 광교산이 보이고 숲의 나무들이 계절에 따라 변하는 것을 보며 그 풍경을 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소나무와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졸참나무 등이 적당히 섞여 있고 아카시아 나무도 많은 숲은 특히 바람 부는 날이면 창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게 한다. 활엽수들의 너울너울 활기찬 춤사위와 선비처럼 점잖은 소나무의 어깨춤이 볼만하고, 비바람이 치는 날이면 숲에서 나는 소리가 마치 깊은 계곡의 물 흐르는 소리 같아 듣기가 좋다.
코로나19로 체육센터에 갈 수 없게 되면서 동네를 걷기 시작했다. 공원, 하천가, 초등학교 운동장을 걸었다. 그러다 광교산 능선 길을 알게 되었다. 등산로처럼 가파르게 올라가지 않고 평지를 걷듯이 조금씩 올라가니 힘들지 않다. 숲길을 걷는 것은 러닝머신 위에서 걷는 것과 많이 다르다. 처음에는 습관처럼 이어폰을 끼고 걸었다. 걸으며 뭔가를 같이 해야 시간이 아깝지 않아서다. 그러나 곧 이어폰을 빼버렸다. 새소리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가 나는 호젓한 곳에서 그냥 자연만 느끼고 생각을 비우고 싶어서였다. 숲에서 나는 온전한 소리만 듣게 되면서 어느새 내 마음의 소리까지 듣는다.
숲이 아름답다고 하지만 보기 싫은 것도 있었다. 낙엽들이 쌓여있는 것이다. 찢어지고, 구멍 나고, 바래고, 삭고, 부서진 것들, 누더기도 그런 누더기가 없다. 세상에 있는 색깔 중 저렇게 보기 싫은 색이 있을까 싶었다. 갈색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물기 하나 없이 바삭 마른 주검들의 무더기를 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숲길을 걸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그렇게 보기 싫던 색깔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특히 가파른 비탈에 나무들이 줄서있고 검은 색에 가까운 갈색의 나무둥치들 밑에 낙엽들이 쌓여있는 풍경이 보일 때 가슴 저 밑에서부터 저릿한 감동이 왔다. 그것은 숭고한 것을 봤을 때 느낌과 같았다. 그러면 마치 다 털어버린 빈 참깨 단처럼, 가벼운 육체로, 정말 너무나도 가벼워진 육체로 우리 곁을 떠났던 내 어머니와 시어머니 그리고 우리 아버지, 내가 임종을 보았던 분들이 생각나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 갈색의 낙엽더미, 발을 디디면 푹 빠질 것 같이 포근하게 보이는 갈색은 검은 줄기와 초록의 잎과 가장 잘 어울리는 자연색이었다. 낙엽더미를 발로 비벼보았다. 낙엽이 두껍게 쌓여있을 것 같지만 곧 흙이 드러났다. 나뭇잎이 땅에 떨어져 바스러지고 썩어 흙이 되기까지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광교산은 숲에 들어가면 길 초입부터 무덤이 보인다. 비석을 세우고 울타리까지 한 무덤도 있지만, 봉분만 있는 것도 있는데 혼자 있는 무덤은 외로워 보여 애처롭고, 아무 장식이 없으나 봉분 두 개가 나란히 있는 것을 보면 보기가 좋다. 아마 그 무덤들이 있는 곳이 예전에는 산 속 깊은 곳이었을 것이다. 광교산 자락에 아파트 단지들이 들어서면서 많은 나무들이 잘려나갔을 것을 생각하면 안타깝다. 그러면서도 내가 이 산자락에 세운 아파트에 살면서 혜택을 누리고 있으니 아이러니다.
창문에서 볼 때는 숲이 빽빽하고 나무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숲에 들어가 보면 나무들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하늘 높이 가지를 뻗고 있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마치 하늘에 햇살길이 난 듯 꼭대기의 잎들이 서로 붙어있지 않고 겹치지도 않는다. 햇빛을 고르게 나눠 받기 위해 이웃나무와 적당한 거리두기를 하고 서 있다. 숲 관리자의 손길에 의해서이기도 하겠지만 햇빛을 많이 받기위해 수관을 주변 나무보다 높고 넓게 형성하려는 본능을 억누르는 나무들의 배려 때문이라는 자연의 이치를 알고부터는 숙연해졌다.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공격적인 해악을 가하고, 힘을 가지고 있으면 자기 주위의 약한 것들을 지배하며 시들게 만드는 인간들의 사회와는 달리 나무들이 서로 배려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워 생각에 빠지게 한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날들이 점에 불과하고, 육신을 이루고 있는 것들은 언젠가는 다 썩게 될 것이며 육신에 속한 모든 것은 강물처럼 흘러가 버린다 하더라도 살아있는 동안에는 저 나무들처럼 남을 생각하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홀로 서서 고독을 견디고, 달과 바람과 새들과 진심으로 소통하면서 하늘을 우러러 항상 감사하는 나무들이란 생각에 애정 어린 눈길로 다시 보게 된다.
항상 동일한 것 같으면서도 언제나 다른, 아무리 자주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단순 소박한 숲이다. 그 속에서 나는 어느새 들길의 철학자처럼 숲이 들려주는 ‘정적의 소리’를 듣고, 바라보는 시선에 화답하여 나에게로 뿜어내는 숲의 향기를 맡는다. 또 나는 어디서 와서, 지금 어디에 와 있으며, 무엇을 꿈꾸고 있는가 하고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