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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u Ming Jul 17. 2024

중소기업 은둔고수의 강호 진출기

호구여도 괜찮아 #27 : 하악골융기 (기)


호구가 고수임을 증명하는 방법


직장인이 자신의 숨겨둔 실력을 가장 빨리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은 이직이다. 

나는 이직을 정말 싫어하고 다시는 이직할 계획이 없지만, 직장인을 가장 투명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해 줄 사람은 다름 아닌 면접관이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이력서 그리고 경력과 살아온 이야기로 한판 붙어 그 가치를 인정받는 곳, 이직 시장에 나를 내놓기로 했다.


그러나 군가 혹시 더 올라갈 곳이 없을 만큼 좋은 회사를 다니고 있다면, 생의 대사처럼 '버텨라 그리고 이겨라' 그것이 답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최고의 회사는 아니지만 삼십 대에 상장사의 기획 팀장이 되었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가고자, 회사 근처로 이사까지 갔지만, 결국 사장님은 우리를 버리고 도망갔고, 비바람 속 높은 파도 앞에서 선장을 잃은 배는 순식간에 타이타닉과 같이 침몰했다.


나는 다른 선택이 없었기에, 나의 자아를 잃지 않기로 결심하며 마음을 독하게 먹기로 했다. 지금까지 두 번의 이직을 했기에, 삼십 대 후반에 하게 될 마지막 이직은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더 이상 작은 파도에 배가 침몰까 걱정하거나, 해적들에게 억울하게 배를 빼앗겨, 동료들과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경험을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나는 최고의 자리로 이직해, 내가 가진 실력음껏 발휘하고 싶었지만,

세상 모든 을 내 마음대로 할 수는 없기에, 최소한 지켜야 할 이직의 가이드라인을 세웠다.


첫째, 회사 업그레이드할 것

둘째, 연봉계약x,000만 원 이상일 것

셋째, 이 두 가지를 충족하는 회사에 들어갈 때까지 참을 것


내가 타고 있던 작은 타이타닉은 어느새 해적선이 되어 있었다. 나의 직함이 기획 팀장이 뭐, 타인에게 피해가 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기에, 차라리 그이 시키는 허드렛일을 하겠다고 했다. 나 허드렛일을 하며 나의 자존심은 내려놓더라도, 그보다 우선인 나의 자아를 지키고자 했다.


그러나 '문과생 + 30대 후반 + 편입 + 첫 직장 소기업'의 꼬리표를 가진 내가, 이직의 세 가지 원칙을 지키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번에도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의 심정으로 도전의 문 앞으로 나를 몰아세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자신 있었다. 

왜냐하면 아내와 결혼한 이후, 회사에서 단 한순간도 노력을 게을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삼십 대 초반에는 일을 배우기 위해 나의 무릎은 땅에서 떨어지지 않았고, 달리기 시작한 후에는 신발 끈이 풀려도 무릎을 꿇지 않았다. 나는 항상 노력하는 성실한 개미였다.


성실한 개미, 강호로 나아가다.

때로는 숨이 미친 듯이 차서, 더 이상 한 걸음도 더 못 뛸 것 같은 순간에 고개를 돌려 옆을 보면, 카페나 만화방에 온 듯 회사를 다니는 이들이 나의 신념을 비웃었다. 이가 갈렸고 힘을 빼고 포기하고 싶었지만, 그들과 내가 지금 함께하는 터널의 끝은 분명 다를 것이라 굳게 믿고 나의 신념을 밀고 나갔다. 


그렇기에 나는 자신 있었다. 비록 이직이 어렵고 내 생각처럼 잘 안 풀리지 몰라도, 결국 나의 노력은 나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믿었다.




기획 팀장의 이직


작은 상장사지만 기획 팀장의 타이틀은 괜히 생긴 것이 아니었다. 이미 다양한 기획을 경험했기에 머릿속에 나를 어떻게 팔아야 할지 그림이 그려졌다. 화가가 붓과 연필로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듯, 나는 마우스와 키보드로 워드와 파워포인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왜 당신이 나를 선택해야 하는지'에 대해 스토리 라인을 만들었다. 그러나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는 말이 있듯이, 나는 스스로에 대해서만 잘 알뿐, 현재의 이직 시장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오랜만에 본격적으로 이직을 하려니, 취업 사이트에 아이디가 남아있는지부터 걱정스러웠다. 또한, 어떤 직종으로 이직해야 할지도 정의를 내리기 어려웠다. 기획 팀장이라는 직함을 어렵게 얻었기에, 당연히 기획 쪽으로 커리어를 발전시키는 것이 맞겠으나, 나의 전체 이력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직종은 마케팅이었다. 


무엇보다 이번 이직에서는 스스로를 제값 받고 팔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기획과 마케팅, 두 직군 모두에 닥치는 대로 이력서를 넣기로 결심했다.


이력서는 숫자 위주로 정확히 써 내려갔다. 나의 이력을 이해하기 쉽도록 최대한 단순하게 작성하려고 노력했다. 중국 사업 매출을 수십 배 성장시켰던 영업 직무부터, 글로벌 Q사로 사업 전환과 장기 연속성을 일궈낸 PM 업무, 그리고 세 개의 신사업을 탄생시킨 기획 업무까지, 나의 10년은 빈틈없이 채워져 있었다. 굳이 수식어를 덧붙일 필요도, 성과를 부풀릴 필요도 없었다. 그저 있는 그대로 나를 편견 없이 봐주길 바랐다.


나는 어떤 회사에든 제출할 수 있도록, 파워포인트로 기본 포트폴리오를 준비했다. 일부 내용은 이력서에 이미 있는 내용이지만, 나의 성과와 개인 성향을 시각화했고, 지원하려는 회사에 관심이 충만한 열정적인 지원자라는 인식을 주고 싶었다.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일은 나에게 비교적 보람찬 일이었다. 나는 매번 다른 회사에 포트폴리오를 제출할 때면, 기본 포트폴리오의 신사업 부분에서, 지원하려는 회사와 맞지 않는 아이템 한두 개를 추가하거나 삭제했다. 또한, 친숙한 느낌을 주기 위해 파워포인트 기본 색상을 지원하려는 회사의 색상에 맞추어 조정하고, 메인 페이지에는 그 회사의 제품 사진을 삽입했다.


나는 비록 해적에게 점령당한 침몰하는 타이타닉에 있었지만, 최대한의 집중력과 최소한의 시간을 투입해 이직을 준비했다. 또한, 현재의 회사에서도 나의 본분을 잊지 않고 동료들과의 관계도 소홀히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시장의 피드백이 시작됐다.


정말 황당하지만,  가지 실을 털어놓자면, 스스로 취업 사이트의 공고를 보고 지원한 회사는, 그 어디에서도 피드백을 받지 못했다. (과연 그들이 이력서를 인은 하는지 조차 의심스럽다.) 그러나 드헌터나 채용의 의지가 있는 회사에서 관심을 갖고 직접 연락이  이력서를 제출한 경우에는, 국내 대기업 그리고 외국계 대기업 리지 않고 모두 서류 전형에서 합격다. 기획, 마케팅, 영업, 어느 직종으로 이력서를 넣든, 면접을 보긍정적인 시그널이 돌아왔다.


그러나 큰 회사일수록 채용 과정이 길었고, 외국계 기업은 채용 과정이 더욱 복잡했다. 나의 입사 가이드라인 (회사 업그레이드, 연봉 인상)을 모두 만족할 수 있는 곳 찾는 은 쉽지 않다. 연봉이 높으면 회사가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고, 회사가 마음에 들면 연봉이 기대 수준을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비록 회사에 출근하면 고층 빌딩 사이의 외줄을 아슬아슬하게 걷는 기분으로, 하루하루가 불안하고 조급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 데나 마음대로 입사해 버리기에는 내가 지금까지 해온 노력을 헛수고로 만드는 꼴이었기에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스물일곱 살 그리고 서른 살에 이미 동일한 실수를 충분히 경험했고, 그에 따른 결과가 어떤지도 잘 알고 있었다. 더 이상 권모술수 부장 같은 사람 밑에서, 최소한의 인간적인 존중도 없이, 멍청한 사람들의 수족이 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 정답은 하나였다.'

참는 것이었다.




긴 기다림의 시간


참 오래 참아야 했다. 가을 낙엽이 쌓인 산을 오르며 스스로를 위로했는데, 어느새 산에는 소복이 눈이 쌓여 있었다. 마음이 많이 답답하고 힘들었지만, 아들에게 아빠가 위기를 극복하는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더욱 운동에 매달렸고, 등산에 힘을 쏟았다. 새벽 동이 트는 시간에 산에 올랐고, 다시 석양이 지는 시간에 산에 올라, 해가 지는 석양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더 참아야 하는지... 모든 상황이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두 번의 이직 경험에도 불구하고, 회사를 업그레이드하고 동시에 희망 연봉을 만족시키는 작업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 줄 몰랐다. 그동안 경험했던 이직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회사의 불편한 상황이 계속되면서 초조해지지 않기 위해 운동에 매달렸지만, 때로는 불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쉽게 얻어지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결국 공짜로 쉽게 얻어지는 것은 없었다. 나는 여러 개의 후보 중에서 제일 먼저 연이 닿은 중국계 대기업의 한국 지사장의 약속받은 자리로 이직하기로 했다. 이 회사는 중국에 본사가 있었고, 국내에서는 서울 종로에서 지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중국 대기업으로부터 삼십 대 후반에 한국 지사장 자리를 제안받는 것은 실로 파격적인 조건이었기에, 나는 여기서 내 꿈을 키워보고자 했다.


나는 그 중국 회사를 철썩 같이 믿고 기다렸다. 침몰하는 타이타닉의 허드렛일도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니 예전보다는 참을 수 있었다. 한 달이 흐른 후, 중국 회사에서는 조건을 다시 협의해 보자는 이야기를 불쑥 꺼냈다. 무릎을 탁 쳤다. 나는 또 어리숙하게 퇴로를 마련하지 않는 실수를 했던 것이다. 신뢰가 무너졌다고 생각한 나는 조건 협상 테이블에 다시 앉지 않기로 했다.


호기롭게 협상의 제안을 거절했지만, 스스로 입은 내상은 꽤나 깊었다. 그러나 신은 언제나 위기 속의 사람을 다시 한번 벼랑 끝으로 몰고 간다. 신은 '동트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둡다.'는 불문율을 깨고 싶지 않은 듯, 나에게 가장 어두운 밤을 선물했다.




어둠을 뚫고 새어 나오는 한줄기 빛


매우 어둡고 몹시 추운 겨울이 지나가던 어느 날, 저 멀리서 밝은 빛 한 줄기가 바다와 하늘 사이에서 새어 나왔다. 여의도와 종로에 본사가 있는 대한민국 대기업에서 기획팀을 뽑는다는 공고가 오픈된 것이다. 기다렸던 기회인 만큼 최선을 다해 산업을 조사했고, 간단한 아이디어를 담아 포트폴리오를 제출했다.


면접을 보러 갔다. 임원과 팀장은 나의 포트폴리오를 보고 이미 절반 정도 결심한 듯 나를 환대했다. 첫 번째 질문은 어떻게 이런 시장분석과 아이디어를 낼 수 있었는지였다. 그건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관련 국내외 유튜브를 모두 봤고, 관련 책을 여러 권 읽었다. 국내 관련 업계의 모든 리포트를 읽었고, 그 내용들을 그저 집대성한 것뿐이었다. 두 번째 질문은 좀 더 소프트했다. 집에서 여의도까지 출퇴근하는데 문제가 없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에게 더 데리고 오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함께 와도 좋다는 제안을 하셨다.


나는 긴장된 마음으로 면접을 보러 갔으나, 내 조건을 모두 수용한다는 약속과 함께 2년 이내 팀장 자리를 약속한다는 청사진을 받아 돌아왔다. 결과는 '합격'. 아직 해가 떠오르지 않았어도, 누가 봐도 길고 긴 어둠이 지났음을 수 있었다.


참 재밌는 건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경력사원은 '오퍼레터'라는 공식 서류를 받아야 채용이 확정되는데, 인사팀은 나에게 채용이 확정되었다고 주기적으로 전화할 뿐, 오퍼레터 이야기는 자꾸만 피했다. 그렇게 두 달의 시간이 다시 흘렀다.


뭐 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 그때, 유퀴즈에 나왔던 항해사님이 했던 말이 내 마음속에 깊이 남았다. 항해사님은 해가 뜨기 전 밝아오는 시간을 '박명시'라고 했다. 이른 새벽 시간 갑판으로 올라오면 어둠은 물러가고 빛이 온 세상을 밝혔으나 해가 보이지 않는 상황, 나의 상황과 너무나도 동일했다. 나는 언젠가 떠오를 해를 의연한 자세로 기다리자고 결심했다.


이미 빛이 보임에도 해가 떠오르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필요했다.


결국,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다.

나는 당히 최종 오퍼레터를 받았다.

그리고 그 오퍼레터에는 내가 원했던 연봉도

그리고 내가 그들 마음에 들었음을 알 수 있는 별도의 제안들도 숨어 있었다.


인생에 한 번뿐이었던 여의도 근무 기회


나는 여의도에 한강이 보이는, 높은 건물의 본사로 입사했다.

어린 시절 꽤나 이 건물에서 일해보고 싶었기에 입사 전부터 설레었다.


도대체 어디까지 반전이어야 할까.

대한민국 최대기업에서 연락이 왔다.

"서류 전형에 합격하셨습니다. Liu Ming님은 최대한 빠른 면접 일정을 안내드릴 예정입니다."


이 회사에 들어오기 전, '박명시'를 지나고 있을 때, 만의 하나를 대비하기 위해, 헤드헌터의 요청대로 제출한 이력서가 덜컥 합격한 것이다. 나는 못 본 척하려고 했다. 나도 국내 최대기업이 좋았지만, 주황색 의리 또한 마음에 들었고, 겨우 마라톤 결승을 통과했는데, 다시 출발선으로 돌아가기에는 자신이 없었다.


불현듯, 아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여보, 자기가 고생한 것 알아, 하지만 내가 처음으로 하는 부탁이야. 이번 한 번만 더 도전해 줘. 부탁할게."


'아이고, 내 팔자야!'

나는 마라톤 출발선 앞으로, 다시 나를 려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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