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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u Ming Jul 24. 2024

가족이 함께 오르는 사다리 (마지막 이직)

호구여도 괜찮아 #28


가족이 함께 오르는 사다리


십 년 동안 재직던 회사는 선장을 잃은 해적선이 되어 망망대해를 표류하기 시작했다. 나는 십 년의 노력 끝에 결국 조타실까지 올라갔지만, 다시 한번 이직의 사다리 앞에 설 수밖에 없었다. 비록 내가 올라야 할 사다리는 부실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아내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사다리 받쳐 주다.


그 사다리에는 아내에게 약속한 별이 매달려 있다. 나는 용기를 내어 다시 한번 사다리를 오르기로 했다.


가족이 함께 오르는 사다리




불합격하셨습니다.


마흔이 되기 전까지 참 많이 들었던 말이다. 그중에서도 펑펑 울만큼 아쉽분했던 경험들이 있다. 혼 후 얼마되지 않은 삼십 대 초반, 종로에 본사를 둔 대기업 입사를 목표로 반년 넘게 진행한 신사업 포지션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내가 지원한 대기업의 신사업 포지션, 신사업의 진행 여부가 불투명함에 따라 '확정''연기'를 수없이 복했다. 나의 채용 확정 또한 그에 따라 오락가락했고, 동시에 나의 마음도 당과 지옥을 오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면접을 볼 때신사업 포지션의 팀장님 다른 곳에 지원하지 말고, 기다려 달라는 부탁까지 기에, 기다리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반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 모든 입사 관련 서류를 지참하여, 최종 면접에 참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면접 대기 장소에는, 중소기업 출신인 나와, '코오롱' 대기업에 재직 중지원자, 둘이 면접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긴장한 나와는 달리, 코오롱 출신의 지원자는 지인여유 있게 큰 소리로 전화 했다.


"붙을 거야! 한두 달 뒤 출근하라니까 생각해 보려고..."라는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했고, 그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나는 그의 전화 통듣고, 또 자신 있는 그의 얼굴 표정을 보 주눅이 들었다.


그가 먼저 들어갔고 내 차례가 되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면접장에 들어선 나는 벌써 몇 번을 마주한 팀장님이 익숙했다. 면접을 마치고 돌아서는 순간, 팀장님은 붙잡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미안한데... 윗선에서, 대기업 출신의 지원자를 원할 수도 있어요. 저는 최대한 추천해서 어떻게든 두 명 모두 채용될 수 있도록 할 건데..."


반년 간 마음속에 희망으로 가득 찼던 기대가, 실망과 절망으로 바뀌기까지 일주일이 걸리지 않았다. 벌써 십 년이 넘었음에도 '불합격'을 통보받던 순간이 생생히 기억난다. 야근 중, 두 평정도 되는 불 꺼진 어두컴컴하고 좁은 회의실에서 문을 꼭 닫고 작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Liu Ming님, 반년 넘게 최선을 다하셨는데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불합격하셨습니다."

나는 고개를 떨구었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고, 가슴에 무엇인가 꽉 막힌 듯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차마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동안 면접 중에 들었던 이야기를 그대내에게 전달했고, 내 또한 이번에는 합격할 것이라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는 또다시 아내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초라하고 비루한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사람의 연락을 피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 사회는 나에게 보이지 않는 르텔과 진입장벽이 존재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다. 그 이후로, 나는 그 누구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실력을 키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오직 현실에만 몰두했고, 점심시간을 아껴 업무에 집중했다. 상이 그 어떤 불공평한 잣대로 나를 마음대로 제단해도, 현실을 뚫어낼 수 있는 실력을 갖추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를 악 물어서 결심하고 행동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십 년이나 재야에 묻혀, 외롭게 홀로 내공 쌓아야 할 줄은 몰랐다.




합격하셨습니다.


마흔을 넘은 후, 이직을 준비하고 감사하게도 많은 곳에서 합격할 수 있었다. 수많은 고배를 마신 끝에, 마흔이 돼서야 새로운 이직의 역사가 열리고 있었다.

 

'호구여도 괜찮아'라는 신념과 고집으로 시작했던, 호구 속의 몸부림이 드디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재야의 호구 은둔고수 되었고, 다시 번데기 속에 들어가 아픔을 겪고 나비가 되기, 비록 십 년의 시간이 걸렸지만, 나의 신념 틀리지 않았을 증명했다.


나는 국내많은 대기업 계열사에 합격했다. 나의 '호구 인생'에 드디어 꽃이 피는 순간이었다. 약 삼 개월의 시간 동안 내가 합격한 회사들은 열 군데가 넘었다.


① 자동차를 만드는 H 그룹의 계열, 상해 사무소장 : 합격, 중국에 가야 하는 사유로 중도 포기

방위 산업대기업, 컨설턴트 : 합격, 현재의 회사에 합격하며 중도 포기

H 그룹의 계열, 전략기획팀 : 합격 후 세 달간 근무, 현재의 회사로 이직하며 중도 퇴사

④ CCTV, 태양광, 화장품, 유제품, 게임 등을 만드는 회사, 전기획팀 : 합격, 중도 포기


깊은 어둠 뒤 새벽이 찾아오듯, 인내와 실망의 연결고리가, 깊은 바닥 떨어지고 나서야, 모든 들이 기다렸다는 듯 순조롭게 풀리기 시작했다. 복잡하게 얽혀있던 실타래가 드디어 풀고, 심각하게 막혀있던 명절날의 고속도로 정체가 풀린 듯, 이제야 속 시원히 속력을 내고 달릴 수 있게 됐다.



마지막 이직

아내는 나를 만나고 십 년을 넘도록 비천한 나의 상황까지 사랑해 줬다. 그런 아내가 나를 만나고 처음으로 한 부탁이기에, 설사 하늘에 별을 따달라고 해도, 나는 남편으로서 기꺼이 받아들여야 했다. 다시 한번의 이직을 마음속에서 아들이니, 오히려 생각이 단순해 가야 할 방향이  뚜렷해졌다.


이번에 마지막으로 도전하고자  회사는, 십 년을 속해업계에서 최고평가받고 있었기에, 그동안 나의 모든 식견과 통찰을 동원하여, 나의 칼날이 무디지 않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또한, 새롭게 쓰이고 있는 합격의 역사에, 마지막 오점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헤드헌터에게나의 상황을 설명하고 빠른 채용 프로세스와 확실한 피드백을 부탁했다.


마지막 이직의 준비가 시작됐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을 수 있는 모든 정보를 숙지하기 시작했다. 기업이 스스로 공개 경영 보고서, 증권 기관에서 발행한 회사와 시장의 분석 보고서, 리고 회사가 유튜브 개시한 채널의 모든 동영상들을 보고 또 보고 어떤 포지션의 어떤 인재를 원하는지 심층 분석했다.


지원자로서 외부인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수박 핥기가 아닌 수박안으로 들어가고자 최선을 다했다. 수백만 원의 시장분석 보고서를 지인을 통해 얻어서 수백 페이지를 복해서 고, 유튜브에 나오는 사무실에 앉아있는 상상을 하며, 업계와 회사를 이성적으로 또 감성적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기존 포트폴리오에 3C 분석 (Customer, Competitor, Company)을 더했다. 이미 여의도에 있는 회사에 잘 다니고 있었고, 더 이상 이직을 고려해도 되지 않을 만큼 좋은 직무에 배정되었고, 임원께서 미래의 팀장 자리까지 약속했기에, 굳이 렇게까 격에 목맬 필요는 없었지만, 내 최대 기업에 합격하 모습을 아내와 나 자신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글로벌 시장, 경쟁사, 회사, 고객까지 수십장을 분석해서 포트폴리오를 제줄했다


'정말 이렇게까지 하는데, 과연 떨어뜨릴 수 있을까?

  그 어떤 유리 장벽있더라도, 쉽게 떨어뜨리기는 어려울 거야. '


라는 생각이 들 때까지 준비했다. 2차 면접관으로 꽤나 많은 사람이 참여했고, 몇 번의 개인 면접을 통해 인성을 검증받았다. 면접은 당일 저녁 늦게까지 진행 됐음에도, 결과가 이례적으로 다음 날 에 발표 됐다. 분명 국내 회사 중 채용 절차가 가장 느리다고 들었는데 적어도 나의 케이스는 예외인 듯했다.


마지막 임원 면접이 남았다. 입사한 지 몇 개월 되지 않음에도, 연차를  번 쓴 상황이었기에, 혹시 퇴근 후의 저녁 시간으로 면접 스케줄을 조정 가능해줄 수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그날 저녁, 회사는 모든 임원의 스케줄을 특별히 저녁으로 미루었다고 드백을 줬다. 중소기업에서 임원들의 스케줄을 하나의 시간에 맞추는 것은 힘든 일인데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대한민국 최대 기업은,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그 어떤 회사보다 나를 인간적 존중하고 배려했으며, 명확하고 신속한 피드백으로 불안에 떨지 않게 했다. 회사는 필요하고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데려가겠다는 의지가 확실한 것처럼 행동했다. 나는 비록 수많은 지원자 중 한 명이지만, 충분한 존중을 받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안정되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인내해 준 시간들


최종 면접이 끝난 시간이 전 일 저녁 8시쯤이었는데, 면접 결과를 다음 날 오전 9시에 들을 수 있었다. 떻게 이렇게 모든 절차가 빨리 진행되는지 신기했다. 사하고 들은 이야기지만, 내가 빨리 처리를 해주지 않으면 입사하지 않겠다는 잘못된 소문이 나있었다. 잘못된 소문에도 불구하고 협조해 준 회사에 감사할 따름이다.


여하튼, 나는 회사로부터 최종 결과를 듣자마자, 아내와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어머니) 최종 합격했어요."

둘의 대답은 같았다. "여보(아들), 너무 고생 많았어. 참 자랑스러워."


나중에 들 이야기로,

아내와 어머니는 따로 전화 통화를 하며, 너무 감격한 나머지 눈물이 나왔다고 했다. 

아마도 이직의 긴 시간 동안,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옆에서 당사자보다 더욱 마음 졸인 듯했다.


아버지에게 처음 명함을 가져다 드린 순간도 기억에 남는다. 아버지는 일하시는 약국에 명함을 올려 두시고, 손님들이 막내아들은 혹시 어느 회사에 다니는지 묻기만을 기다다고 하셨다.


끝까지 나를 믿고 기다려준 아내 양부모님께 감사드렸다. 이은 모두 오랜 시간 나의 부족함 들춰내지 않았고, 나의 부족함을 다른 사람 앞에서 이야하지 않으며, 오히려 덮어주고 감싸주려 다. 오랜 시간을 나와 함께 인내했고, 결국 좋은 결과를 얻었을 때, 이들은 누구보다 기뻐했고 마음껏 자랑하고 싶어 했다. 


부족한 나를 단 한 번도 비난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름, '가족'이었다.




최고의 회사에서 본업을 시작하다


나에게 남은 마지막 고민은, 현재의 전략기획팀에서 다시 최전선인 마케팅으로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로벌 Q사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현장에서 고객을 상대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잘 알게 되었기에, 기획 업무를 버리고 마케팅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려웠다.


그러나 모든 사업과 업무에 기획은 어디에나 존재하며, 고객의 위치 기준으로 후방부대인 기획팀보다는, 나의 모든 장점을 발휘해 볼 수 있는 최전방인 마케팅, 즉 나의 본업으로 늦지 않게 돌아가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무렵, 우연히 '뭉쳐야 찬다.'라는 TV 프로그램을 시청했다. 이 프로그램은 은퇴한 국가대표 운동선수들이 자신의 주종목을 뒤로하고 모여서 축구를 하는 내용이었다. 그때, 테니스의 전설 이형택 선수가 다른 국가대표들이 자신의 주종목(태권도, 농구, 야구 등)로 본 실력을 보여주는 동료 선수들에게 이야기했던 부분이 인상 깊 기억에 남았다.


"역시 본업을 해야 멋있다니까!"

나는 다시 본업을 시작하기로 했다. 출발점에 다시 설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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