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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u Ming Jun 02. 2024

마지막 하얼빈, Hey Jude

호구여도 괜찮아 #16


칭다오는 영화 '마보로시'에서 나오는 시간이 멈춘 도시 같았다.


나는 언젠가 다시 시간이 흐를 것이라 생각하며, 그저 하루하루를 견디며 지냈다. 저녁이 되면 주 대리가 주도하는 소주 전쟁에 참전하거나, 아니면 불투명 유리방에서 주 대리의 LG 트윈스를 향한 욕설 섞인 응원을 피해 헤드셋을 끼고 영화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헤드셋을 끼면 답답했고, 헤드셋을 벗으면 욕설을 참아내야 했다.


 이상 시간이 멈춘 듯 살아갈 수 없었다. 나는 약속의 대상, 그녀를 만나러 가야 했다.




하얼빈으로 향했다.


2010년, 스물여덟 살, 칭다오에서 하얼빈으로 가는 비행기에 앉아 있었다.

졸업 후 국에 귀국했지만, 중국 칭다오로 다시 돌아와 첫 직장을 시작했기에, 분명 첫사랑과의 약속을 지켰다. 그러나 그녀는 나에게 칭다오가 아닌 하얼빈에서 일 자리를 으라고 끊임없이 전화로 떼를 썼다. 일 반복되는 답 없는 통화는 나의 마음을 지치게 했다. 저녁노을이 비행기 창문 너머에서 점점 사라져 갈 때,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비행기는 이륙했고 나는 금세 잠들었다.


하얼빈에 도착했다.

학창 시절, 인민폐 1위안을 내고, 만원 버스를 타고 다녔던 그녀는, 늦은 저녁 포르셰를 타고 공항에 마중 나와 있었다. 집이 가난하다고 말을  적은 없지만, 그녀는 알고 보니 하얼빈에서 꽤나 알아주는 집의 딸이었다. 포르셰를 타고 하얼빈 시내로 들어가며 나는 처음 보는 그녀의 모습에 당황했다. 그녀는 나를 하얼빈 타워가 보이는 마천루로 데려갔다.


영화처럼 열쇠를 돌려야만 올라갈 수 있는 건물의 꼭대기 층에 도착하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저 멀리 하얼빈의 야경이 보이는 통창 앞에 정장을 입은 아주머니가 서 있었다. 아주머니는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걸어와 자신을 첫사랑의 어머니라고 소개했다.


이십 대 후반의 남자는 스스로 꽤 어른이 됐다고 생각하지만, 한 여자와 미래를 그리기에는 여전히 미숙하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하얼빈 맛집에서 데이트나 하고 다시 칭다오로 내려갈 계획이었던 나는 당황했고, 미리 말하지 않은 그녀에게 화가 났지만 애써 침착한 척 간단한 내 소개를 했다.


하얼빈 타워가 있는 곳은 하얼빈의 강남 같은 곳이다.


하얼빈에서 이틀이 정신없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그녀의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 그 집의 지인들 그리고 그 집의 강아지까지 만났다. 사람들은 나에게 친절했고 외국인인 나를 최대한 배려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나는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그저 모든 상황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하얼빈에 오랜만에 왔기에, 학창 시절 좋아했던 하얼빈 맛집을 가고 싶었고, 학교 후배들도 만나고 싶었다. 나는 명절에 억지로 큰 집에 끌려온 중학생처럼, 말없이 시계를 보며 그녀가 원하는 자리에 앉아있었다.


칭다오로 돌아가기 하루 전, 그녀의 어머니는 단둘이 식사를 하고 싶다고 하셨다

하얼빈에서는, 누군가 먼 길을 떠나보낼 때, 기차역 앞 만두집에서 만두를 사주는 것이 예의라고 셨다. 어색한 식사가 끝날 때 , 식탁으로 가까이 몸을 당기시며, 나를 지켜보니 좋은 사람인건 충분히 알겠다고 하셨다. 그러나 중국에 계속 살 수 있는지 물으, 잘 생각해 보라며 여러 번 덧 붙이셨다.


나는 그제야 상황을 깨달았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은 시절, 꿈에 대한 정과 패기 그리고 독특한 삶을 살겠다는 가치관이 나를 중국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유학을 마치고, 중국에서 일을 시작하며 투명한 에 대한 고민과 무미건조한 생활에, 이미 마음이 피폐해진 나는 듣기 좋은 말이라도 마음에 없는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내 수 없었다.


다음 날, 그녀와 그녀의 친구들은 내가 아는 모든 독일 브랜드의 차를 타고 나를 공항에 데려다주었다. (왜 이렇게 차가 많이 왔는지 모르겠다.) 아이러니하게도 하얼빈에 온 지 며칠이 지났지만 돌아가는 비행기 탑승장 앞에서 그녀와 처음으로 단둘이 서게 되었다. 나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얼빈에 오고 처음 보는 그녀눈에서 눈물이 차올랐. 나는 이별을 직감다. 그 후 말없이 돌아서서 칭다오에 돌아왔다. 일주일 뒤, 그녀는 칭다오로 나를 찾아오겠다고 했지만, 나는 하얼빈 공항 탑승장이 우리의 마지막이라고 답다.


공항은 이별과 만남의 장소이다.

어린 시절 나는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않아."라는 말을 자주 했다. 小기업 커리어가 시작된 것도, 팡 과장과 주 대리를 만나게 된 것도, 큰 교통사고가 난 것도, 모두 스스로 한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순진한 신념으로 시작된 일이다. 나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목표와 약속이 대치되는 상황에서 무리하게 약속을 지키는 것을 강행했다.


나는 약속을 지킨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와 그녀는 어리석은 약속으로 이별의 시간을 조금 미루었을 뿐, 서로가 받아야 할 상처는 여전히 키워내고 있었을 뿐이었다. 조금 더 냉정하고 현명하게 스스로를 위한 판단을 했어야 했다.


故 김수환 추기경은, 약속을 지키는 것이 사랑이라고 했다.

나의 첫사랑은, 약속의 책임을 다한 하얼빈 공항까지였다.




나는 나를 함부로 대하기 시작했다


중국인 여학생과 교제한 이유였을까, 나는 중국통의 길이 여기까지라고 생했다. 국을 무대로 한 독특한 삶의 계획은 이제 끝났다고 여겼다. 마음의 상처를 마음대로 쌓아가며, 몇 달 동안 마음대로 망가 갔다. 퇴근 후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술에 취해 보냈, 처음 겪는 절망과 동고동락했다. 될 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살았고, 너무나도 많은 실수들은 점차 일상이 되어갔다. 이런 엉망진창을 함께하기에, 주(酒) 대리는 그 명성만큼 최고의 파트너가 되어 주었다.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지조차 잊어버렸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무엇이 잘못되고 있는지조차 관심이 없었다.


더, 더, 더 추락하라는 마음으로 살아가던 어느 날, 출근 차를 운전해서 교차로를 지나고 있을 때, 오른쪽 도로에서 검은색 폭스바겐이 전속력으로 달려왔다. 폭스바겐은 내가 운전하던 차의 조수석쪽으로 강하게 들이받았다. 사고가 발생한 순간, 부딪힌 차 안에서 내 몸도 크게 요동쳤다. 양쪽 차가 모두 반파되는 큰 교통사고가 일어났다.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 엄마가 떠올랐다.

더 이상 나를 함부로 다루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그만 긴 터널에서 나가고 싶었다


교통사고 후, 새해 연휴를 맞았다.

나는 바다를 보면 마음이 편해질 것 같다는 생각으로, 주 대리와 단둘이 칭다오를 벗어나 연태의 바다가 보이는 작은 호텔에서 하루를 묵기로 했다. 출발하는 날, 우연히도 눈이 많이 와서 고속도로가 완전히 봉쇄되었고, 예상했던 두 시간의 여정이 여덟 시간으로 늘어났다. 그때는 내비게이션이 완벽하지 않았고, 눈 덮인 비포장 도로를 가야 했기에, 우리는 시골 마을을 여러 번 지나며 겨우 연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는 연태에서 바다가 보이는 작은 포장마차로 들어갔다. 나에게 주 대리는 칭다오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기에,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을 정리하고 싶었다. 그러나 주 대리는 나의 이야기에는 크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칭다오에서 연태까지 둘이 여행을 왔고, 작은 포장마차에 한국 사람은 그와 나 단 둘 뿐이었고, 리는 1년이나 함께 살았기에 나는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했지만, 내 앞에 앉아있는 사람은 그저 직장 동료였던 것이다. 나는 타인의 생각은 고려하지 않고 이기적인 마음으로, 직장 동료를 붙잡고 하소연하고 싶어 했던 것이다.


현실을 깨닫고 나니, 나는 스스로 더 초라하게 느껴졌다. 어머니를 비롯한 나를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졌다. 중국통의 꿈은 잠시 접어두더라도, 스스로를 잃지 않기 위해, 현재의 직장을 정리하고, 한국에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여행에서 돌아오고 출근한 첫날, 나는 사장님께 퇴사하겠다고,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며 고개를 숙였다. 사장님과의 면담은 일주일간 이어졌다. 사장님은 결국 내가 뜻을 굽히지 않자, 장기근속을 바라셨다며, 이후에는 칭다오 공장까지 맡길 생각이셨다고 아쉬움을 표현하셨다.


사장님의 좋은 평가에 깊이 감사드렸다, 하지만 더 이상 나 자신 망가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사장님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고개를 숙이는 것뿐이었다.


나는 후임자적응할 때까지 근무하며, 모든 업무를 인수인계고, 최대한 빠르게 한국행을 준비. 설사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나이력에 불리한 기록을 남긴지라도, 더 이상 나 자신이 망가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나의 첫 직장과 함께한 어리석은 약속은, 1년이라는 짧은 시간으로 마무리되었다.


비틀스의 헤이주드는 나에게 위로가 되었다.


칭다오에서 석양을 바라보며, 나의 꿈도 첫사랑도 끝이라고 절망했을 때, 비틀스는 나에게 노래로 위안을 건네며, 세상의 모든 짐을 다 지려고 하지 말라했다. 그럴수록 나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한국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비틀스의 Hey Jude는,

나의 닫혀있던 마음속 어둠 작은 촛불처럼 외로운 칭다오 생활을 함께 다.


[The Beatles - Hey Jude]
And anytime you feel the pain
고통을 느낄 때마다
Hey Jude, refrain
주드, 마음을 가라앉혀
don't carry the world upon your shoulders
세상의 모든 짐을 다 지려고 하지 마
For well you know that it's a fool
알다시피 괜찮은 척하는 사람만큼 바보 같은 사람도 없어
who plays it cool By making his world a little colder
그러면 결국 차가운 세상 속으로 내몰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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