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등학교 졸업후, 10년동안중국을 집처럼 여기며 살았다. 스스로 김치 없이 못 사는 '찐'한국인이라고 자부했지만,살아온 인생의 3분의 1을 중국에서 지내니, 그 시간들은 나를절반은 한국인, 절반은 중국인으로 만들었다. 아내는절반의 중국 사람이었던 나를 한국 사람으로 만들었다고하며, 잊을만하면 꾀죄죄했던시절을기억에서 끄집어내웃는다.나의 어떤 점이 그렇게 중국 사람 같았을까.
첫째, 다른 사람을 개의치 않았다.
'개의치 않는다'는 표현은 나에게 긍정적으로 다가온다. 나는 주관이 뚜렷해서 남의 시선을 크게 개의치 않고, 한국 특유의 비교 문화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무단횡단하는 버릇만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지만...
둘째, 무엇을 입어도 짝퉁 같았다.
중국에서 유학하면서뭘 입어도 짝퉁 같아 보였다.친구들 표현에 의하면 '중국티'가 절로 묻어 나왔다.도쿄에서 유학을 하고 강남에서 회사를 다닌 아내가 나를 처음 봤을 때, 놀란 것이 이해가 된다.
셋째, 말을 하는 방법이 중국 사람 같았다.
나는 무슨 말을 하든 "음, 그건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어."라고 말한다. 무슨 주제가 나오든 항상 세 가지로 생각하고 말하는 습관이 신기하다. '첫째, 둘째, 셋째'의 틀은 평생 가지 않을까 싶다.지금의 글처럼...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 첫 직장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백수 시절로 돌아가 본다.
나는 취직했다, 부모님 가게 전무님으로
2011년 4월, 스물아홉 살. 나는 길었던 중국 생활을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첫 직장 생활은 영광 없는 상처로, 이력서에 1년의 어중간한흔적을 남겼다. 마음이 지쳐있는 나는 적어도 한 달은 아무 생각 없이 쉬고 싶었기에, 부모님 가게를 도와드리며 지내기로 했다.
어느날, 어머니는나에게 조심스레 물으셨다."중국에서 근무했던 회사는 한 해 매출이 얼마쯤 됐니?"
어머니에게말씀을 드리니,깜짝 놀라며 말씀하셨다."우리 가게 매출의 절반이 안되는데?"
맙소사.. 나는 부모님 가게보다,한참이나 작은 회사에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페인트 회사의 대리에서, 부모님 가게의 전무님으로 고속으로승진하는 기분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빨리 돌아올 것을...
*참고로 전무라는 직함은 내 마음대로 붙인 것이다. 부모님 가게는 평범한 동네 마트였다.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데로 취직할 거예요
어머니가 차려주신 밥을 먹으면 먹을수록,마음이 안정되어 가는 듯했다.그리고 마음이 안정되어 가는 만큼, 중국에서 무리한 도전을 하며 살기보다는, 한국에서 안정되게 부모님 곁에서 지내고 싶었다.그래서 나는 집에서 출퇴근할 수 있는 회사에 취직하겠다는, 다소어른스럽지 못한재취업 가이드라인을 세웠다.
부모님 가게에 있는 어느 날 전화가 왔다.
"저는 OO 회사의 영업 전무입니다. 이력서를 보고 관심이 있어, 면접을 제안드립니다."
나는 어느 한 곳 이력서를 제출한 적 없지만, 전무님께서 취업 사이트에 올려져 있던 이력서를 보고 전화를 한 것이다. 전화가 온 곳은 대기업은 아니었지만, 부모님 집에서 출퇴근할 수 있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1차 인적성 테스트, 2차 팀장 및 임원 면접, 3차 최종 사장님 면접을 봤다.최종 면접 후 곧바로 합격 통지를 받았다.
그러나첫 출근하는 날 확인한 근로계약서에는,면접 중약속받은 연봉과 경력 인정 부분이 빠져있었다.입사 예정자인 나와 어떠한 사전 협의나 예고도 없이, 제멋대로 결정한 회사의처사가황당하고 억울했다. 그렇다고 입사하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어려웠던 나는,부모님 집에서 출근할 수 있다는 점에 위안을 삼으며수긍하기로 했다. 나는 어중간한 평가와 대우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어, 회사에게 해야 할 정당한 요구를 건너뛰고 입사하게 되었다.
마치끈적끈적한송진이 손에 묻은 듯, 찝찝한 시작이었다.
두 번째 입사한 회사는 클린룸을 겸비한 디스플레이 소재 제조업체로, 나름 오래된 업력과 선진 된 기술력을 갖추고 있었고, 경기도 평택에 큰 공장을 몇 개 운영하고 있었다.영업팀에는 명문대 출신부터 대기업 경력을 가진 화려한 선배들이 많았고, 외국어도 능숙하게 사용했다. 한국 및 중국의 주요 거래처 외에도 싱가포르, 홍콩, 대만, 말레이시아에 거래처가 있었고, 중요한 커뮤니케이션은 영어가 기본이었다.
중국에 주재하며 중화권 영업은 경험했지만, 바다 건너 다른 나라에 물건을 파는 일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선배들에게 혼나며 수출 업무(수출 서류 작성, 신고 절차 등)를 배웠고, 미숙해도 영어로 업무를 진행하는 것은 내게 즐거운 도전이었다. 중국의 첫 직장에서 퇴근할 때면, 휴대전화 배터리가 방전될 정도로 하루 종일 전화가 쏟아졌지만, 해외 영업은 하루 한두 번의 안부 전화로 충분했고 나는 비교적 워라밸이 지켜지는 점이 좋았다. 입사 후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비교적 규모가 작은 대만과 싱가포르 시장을 담당하게 되었다.
해외영업을 배우는 것은 신나는 도전이었고, 나는 그 안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천당 아래 분당
성남시 분당구, K 타워 & SK 타워
입사 후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나는 부모님 댁에서 출퇴근이 가능했던 평택 본사에서, 자취방을 얻어야 하는 분당 오피스로 발령이 났다. 나는 평택 본사로 출퇴근을 하기 위해 차도 샀었기에, 면접 과정에서 이런 계획을 미리 알려주지 않은 회사가 야속하게 느껴졌다. 결국 고향 집에서는 반년도 못 살고, 다시 부모님 곁을 떠나게 되었다.
비록 떠나는 마음이 아쉬웠지만,새로운 환경은 나를 새로운 이야기로 이끌었다.
나는 고층빌딩과 도시스러운 분당의 분위기가 좋았다.
내가 근무하는 K타워는, 여러 대의 엘리베이터가 바쁘게 사람들을 실어 날랐고, 엘리베이터부터 사무실 바닥까지 카펫이 깔려 있었다. K 타워에 출퇴근하는 사람들은 모두 깔끔한 비즈니스 캐주얼 차림으로, 학교 다닐 때 상상했던 일반적인 회사의 모습이었다. 나는 조용하고 깨끗한 사무실과 정자동 카페 거리가 좋았다. 중국 칭다오, 시골에서만 근무해 본 나로서는 도시스러운 분당의 분위기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비록 경력 인정을 받지 못한 중고 신입이었지만, 팀의 막내로서 선배들의 귀여움을 받았고, 선배들은 성심성의껏 일을 가르쳐 주었다. 특히 저녁에 선배들 가운데 앉아 삼겹살에 소주 한잔을 할 때면, 내가 제대로 된 회사에 다니고 있구나 하는 안도감이 느껴졌다.
정장 위의 나비
나는 중소기업 중에서도 평균 급여가 낮은 회사에 다니고 있었지만, 똑똑하고 좋은 선배들이 많은 우리 회사를 좋아했다. 우리 회사가 대기업은 아니지만, 그래도괜찮은 회사에 다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근무하는 K 타워옆에는, 쌍둥이 빌딩인 SK의계열사 사옥이 있었다.
두 빌딩은 3층에서 이어져 있었기에,자주 마주치게 되는 SK직원들을 관심 있게 살펴보곤 했다.가장 눈에 띄었던점은, 정장을 입은 SK 직원들은작은 금속 배지를 옷에 달고있었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SK 그룹의 상징인 나비 모양의 배지였다.나비 모양의 배지는 햇빛을 받으면 반짝거렸다.
마치 군인이 받은훈장처럼 반짝거리는 나비 배지를, 나는 이 사회가 주는 인정의 상징처럼 느꼈다.
나는 동일 직종 대기업 직원들과 비교해도, 적어도 중국 관련 일에서는 특별히 부족한 점이 없다고 생각했다. 중국어뿐 아니라 중국 비즈니스 관련 책이나 경제 신문, 중국 관련 리포트 등을 틈틈이 구독하면서, 내 분야에서 능력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나도 반짝이는 배지가 갖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이 사회는 모두를 존중할 만큼 성숙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를 인정해주지는 않았다.
내가 이 사회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은 존중까지였다.
2400만 원, 당신의 가치입니다.
회사는 설립의 근간이자 미래의 성장동력이 될 신사업을위해, 전국 각지에서 근무 중인 에이스들을 평택의본사로 불러 모았다.영업팀에서는 사수가 먼저 착출 되어이미 신사업팀에서근무 중이었고, 회사는폭발적으로 성장 중인 중국 디스플레이 시장을 대응하기 위해,영업팀에서차기 대상으로 나를 지목했다.
회사는 이미 한 차례 나를 평택 본사에서 분당으로 원치 않는 발령을 지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분당 근무에 적응한 나를 다시 본사로 재배치하려 했다. 계획성 없고 배려가 부족한 인사 배치를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나는 이미 분당에 신혼집을 알아본 뒤였기에, 평택 본사로 돌아가라는 지시가 권고사직처럼 느껴졌다.
나는 회사 인사팀과 여러 차례 근무지 변경 관련 면담을 진행했다. 면담 중, 우연히 나는 나의 연봉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채용 과정의임원 면접 중, 영업 임원이 인사팀에 전화해서 확인한 연봉은 2700만 원이었다. 그러나 최종 면접 후 입사하는 날, 회사는 돌연 나의 1년 경력이 인정되지 않았다며 300만 원을 하향 조정한 2400만 원을 제시했다.그러나 사실을알고 보니, 다른 신입 사원들은 300만 원이 많은 2700만 원을 받고 있었다.
연봉 하향 조정의 사유는 1년 경력이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고,
중국에서 대학교를 졸업했다는 이유로, 회사에서 임의로페널티를 준 것이었다.
다만, 회사에서는 내가 입사일에 어깃장을 놓을까 봐, 적당한 핑계를 둘러댔던 것이다.
회사의 불공정한 대우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에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반면, 회사는 꽤 쓸만하다는 것이 증명된 나를, 성장하는 신사업 중화시장에 하루라도 빨리 투입하고 싶어 했다. 회사는 안달 나 있는 것처럼, 그동안 인정받지 못했던 연봉 차액은 일괄 지급할 것이며, 동시에 승진 혜택도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나를 속인 회사에게 신뢰를 잃었고, 나의 노력과 능력을 업신여긴 회사에게 분노했다.회사는 마음이 돌아선 나에게 감언이설을 늘어놓았지만, 한 번 느낀 굴욕감은 자꾸만 입안에서 쓴맛으로 맴돌았다. 결혼 문제까지 얽힌 근무지 전환 문제와 자존심 문제가 더해지며,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나는 결국 두 번째 회사를퇴사하기로결심했다.
처음에는 부모님 집에서 출퇴근하며, 장기 근속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회사의 부당한 연봉 대우와 일방적이고 반복되는 근무지 변경 문제는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은 단지 경제적인 보상만이 아니라 나의 노력과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었다. 나를 제대로 평가해 주고, 내가 성장할 수 있는 곳을 찾기로 결심했다.
마흔이 넘어 사회생활 베테랑이 된 지금, 30대 초반을 돌이켜 보면, 그때 했던 고민들과 속상했던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나는 다음 회사를 구하지 않은 상태에서 퇴사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했다.
나의 청년기는영화 파묘와 같았다.
또 (베이징에서 하얼빈으로 편입한 것),
또 (어리석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첫 직장을 소기업에서 시작한 것),
또 (집에서 출퇴근하겠다는 생각 하나로, 경력과 연봉을 인정받지 않고 입사한 것),
또(연봉도 못 올리고 다른 회사를 구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퇴사한 것),
나는 5년 사이에 스스로 몇 번의 무덤을 파며지하로 내려갔고,
다시 올라가기 위해 내 젊음을 받혀야 했다.
어머니는 자주 말씀하셨다.
"우리 아들은 무엇이든 지가 해보고 다쳐봐야 스스로 깨닫고는 해"
나는 넘어지고 무릎이 깨진 후에야 가야 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구분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