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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u Ming May 26. 2024

스물일곱, 자살골을 넣다

호구여도 괜찮아 #13

성적표를 나누어주는 우리 사회


현재의 회사로 이직한 후, 첫 명절에 큰집의 큰형이 나를 손짓하며 불렀다. "인사해, 미국 A사 법인장으로 있는 매형이야" 매형에게는, 나를 가리키며 "이쪽은 B사 마케팅 팀에 있는 동생이야"라고 소개했다. 큰집의 매형은 미국 주재원으로 오래 있어 왕래가 많진 않았어도, 결혼한 지 이십 년이 넘었기에, 매형도 나도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큰형은 마치 우리가 처음 만나는 사람들인 것처럼 인사를 시켰다. 


아마도 큰 형은 내가 도움 받을 일이 있을 수 있으니 미리 매형에게 인사를 시킨 셈이겠지만, 그동안 내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는지 묻지 않은 명절 모임에서, 내가 대기업에 다닌다고 하니 이제야 관심이 생겼구나라고 생각이 들었다. 


큰집의 큰형이 한편으로는 이해가 된다. 모두 잘 나가는 친척들(의사, 한의사, 교수, 변호사, 대기업 임원은 물론이고 심지어 사촌 여동생은 서울대법원 판사다) 사이에서 한 번은 동생을 아끼는 마음에 정식으로 소개를 시켜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제야 나도 이 무리의 한 명이 되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죽은 시인의 사회'의 가르침대로 독특하게 살며 내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제멋대로인 기준에 비추어 볼 때,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하기에 어색한 'D' 정도로 평가되었을지도 모른다. 'A'는 아니어도 'C'쯤 될 것 같았던 나의 사회생활이 어떻게 'F'로 시작하게 되었는지 이야기해보고 싶다. 왜 호구여도 괜찮다고 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말이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는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성적표로 개인을 평가하는 사회에 가장 반대하는 사람 중 하나다. 첫 직장이었던 소기업을 포함해, 나의 중소기업 경력은 13년이 넘는다.




철없는 약속, 'F' 성적표의 시작


비교 사회를 강하게 반대한다 (이미지 : Copilot)


지금의 아내를 만나기 전, 몇 명의 여학생들과 만나본 적이 있다. 청소년들의 사랑은 이몽룡과 성춘향,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아름답기 그지없지만, 마흔이 넘은 지금은 그저 이성 친구 사이 정도로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대학생이 된 남녀의 사랑은 그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뜨겁고 열정적이다. 마치 모든 것을 내줄 것처럼 강렬하다. 이 세상의 모든 발라드는 그들을 위해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차가운 비를 맞으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은 기본이고, 헤어진 사람을 아주 긴 시간 동안 그리워하는 것도 흔한 일이다. 나 역시 그런 철없고 대가 없는 뜨거운 열정에 빠진 적이 있었다. 


중국 베이징 올림픽 개최를 1년 앞둔 2007년, 하얼빈에서 중국인 여학생을 만났다. 

대학생이지만 고등학생처럼 순수한 미소와 마음을 가진 그녀는 하얼빈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한국어를 배우고 싶다며 학원을 찾고 있었고, 나는 중국어를 배우기 위해 학원을 찾고 있었다. 그렇게 우연히 외국어 학원에서 만난 그녀와 나는 서로에게 첫사랑이 되었다. 나는 연애 경험이 많지 않았지만,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의도하지 않게 그동안 상처를 주는 역할을 담당해 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 관계에서는 누군가 상처를 받아야 한다면 이번에는 내가 상처받는 쪽이 되겠다는 어리석은 생각으로 만남을 시작하였다.


스물다섯 하얼빈 한국인 유학생인 나와, 스물하나 중국인 여학생은 서로에게 좋은 친구였고, 언어를 서로 가르쳐주는 선생님이기도 했으며, 나비가 되려 몸부림치는 젊은 성장의 진통을 치료해 주는 반창고이기도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그녀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대하려 노력했던 것 같다.


그러나, 가수 하림의 노래 '출국'처럼, 남녀의 사랑은 비행기 이륙 한 번으로 정리가 되기도 한다.

유학생의 은 모국으로의 귀국이며 이는 곧 이별을 의미한다. 오랜 유학의 경험으로 이미 이별을 직감한 나는, 서로에게 좋은 추억으로 남을 수 있도록 가능하면 빨리 헤어지려 했다. 그러나 나는 생각처럼 모진 사람이 아니었다. 부메랑처럼 결국 상처로 돌아올 추억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졸업까지 이어졌다. 졸업이 가까워 오며 더욱 자주 울었던 하얼빈 여학생에게, 나는 힘들어도 해야 하는 헤어지자는 말 대신, 그 자리를 모면하고자 해서는 안될 말을 하고 말았다. "그만 울어.. 내가 중국에 다시 돌아올게" 


나는 따뜻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내 입에서 나온 약속은 지키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약속을 지키는 길이 내가 생각한 곳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를 이끌 것이라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중국 속담에 "연뿌리는 끊어져도 연뿌리의 실은 이어진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관계가 끊어진 듯하나 미련이 남아 있어 인연을 끊기 어렵다는 뜻이다. 나의 철없는 약속은 대한민국 취업 성적표 'F'가 되어, 멀지 않은 시간에 나에게 돌아왔다.


세상 모든 일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얽히고설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그 영향은 증폭되어 한 개인의 삶에 깊은 흔적을 남기곤 한다.




유학 후의 현실, 멘땅에 헤딩


졸업 후 한국에 돌아왔다. 

중국에서 유학한 나에게 취업 준비는 결코 쉽지 않았다. 한국에서 학교를 다닌 친구들에게는 당연한 정보들이 나에게는 전혀 당연하지 않았고, 모든 것을 친구들에게 묻기에는 미안하고 자존심이 상했다. 게다가 친구들은 사대문 안의 학교에 다니며, 대기업 공채를 통해 취업을 준비해 왔기에, 내가 알고 싶은 것들을 친구들도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꿋꿋이 인터넷 취업 카페에서 필요한 정보를 하나하나 찾아 퍼즐을 맞춰 나갔다. 중국에서 학교를 졸업했기에, 지원하려는 회사의 선택지에서 학교 이름이 입력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고, 중국식 백점 만점의 점수를 한국식 학점으로 환산해야 했다. 게다가 편입까지 했기에 두 학교에 각각 증명서를 요청하고 발급받아야 했다.


취업 사이트에 이력서를 올리는 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가까스로 이력서를 올린 후, 처음 자기소개서를 쓸 때 느꼈던 난감함은 유학생으로서의 약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나는 원어민 수준의 중국어, 좋은 학점, 99 클럽만 준비하면 만사형통일 줄 알았다.


그러나 출발선에 서보지도 못하고, 자꾸만 풀리는 운동화 끈 반복해서 동여 메야했다. 먼저 뛰고 있는 친구들을 바라보며 속상한 마음을 자꾸 추슬러야 했다.




중국에 돌아가겠다는 약속, 그러나 취업할 곳이 없는 현실


나는 약속을 했다. 그것이 철없는 약속이든, 나에게 손해가 되는 약속이든, 그 약속 후의 미래가 어떻게 되든 나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 약속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점에 가장 하지 말아야 할 약속임을 이때는 알지 못했다. 


나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취업 사이트에서, 중국 취업의 섹션에서만 이력서 제출이 가능한 회사를 조회했다. 반면 중국에 소재한 기업들은 이미 직장 경험이 있거나, 주재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뽑고 싶어 했기에 신입 사원인 내가 지원할 수 있는 회사는 거의 없었다. 가끔씩 이력서를 제출할 수 있는 회사들을 발견하곤 했는데, 십중팔구 소기업이었다. 대부분 봉제/액세서리 등의 아직 중국 사업을 정리하지 못한 경영이 악화된 회사들이었다. 


아래 사진은 어느 취업 사이트의 중국 취업 섹션에 올라온 취업 공고 리스트를 캡처한 것이다.

"24년 2월 15일 총 38건의 중국 해외 취업이 진행되고 있고, 그중 신입사원 채용은 0건이다."


'24년 2월 15일 중국 해외 취업 공고 (사진출처 : 잡코리아)


아직 어렸지만, 나는 이미 원어민 수준의 중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게다가 당시에는 꽤나 자랑스러운 스펙이라 할 수 있는 '99 클럽'의 멤버였다. HSK 9급, TOEIC 900점에 더해 학점 역시 4점대에 육박했으니, 누구라도 노력의 결실을 인정할 만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노력에 대한 보답을 인색하게 굴며, 내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친구들은 '99 클럽'의 스펙만으로도 대기업 몇 곳에 합격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말했지만, 나는 대기업에 이력서조차 제출할 수 없는 처지였다. 어리석은 약속은 마치 족쇄처럼 내 발목을 잡고서, 나에게 어떡할 것이냐고 묻는 듯했다. 


너무도 답답한 현실 속에서 한국에서 일을 시작할 수 있는 회사들에 이력서를 제출해 보았다. 서류 전형은 생각보다 잘 통과되었다. 그러나 나는 면접에서 면접관들에게 언제 중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를 물을 수밖에 없었다. 질문을 받은 면접관들의 얼굴은 순식간에 싸늘해지며 결과는 불합격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백전백패의 오명을 쓸 수밖에 없었다. 나의 자존심은 바닥을 뚫고 지하 깊숙이 떨어지는 듯했다.


이십 대 바쳐가며 쏟아부 노력은, 

인정받아야 마땅했건만, 어리석은 약속 앞에서 눈 뜨고 배신당하고 있었다.




2010년 봄을 앞둔 어느 날, 어머니와 산책을 하던 중에 전화가 울렸다. 

전화 너머 제법 나이가 있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희 사장님이 보고 싶어 하시는데, 내일 시간 되세요?" 전화가 온 곳은 신입사원이 중국에 갈 수 있다는 공고를 낸 小기업이었다. 사장님이 직접 최종 면접을 본다는 말에 약간 의아했지만,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다음 날 나는 말끔히 정장을 차려입고 약속된 장소로 향했다. 


도착한 곳은 소박한 음식점이었다. 사장님은 편안한 미소로 나를 맞이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정중하게 대접해 주셨다. 그리고 사장님은 나에게 중국에 바로 갈 수 있느냐고 물으셨다.


"네, 비자 준비되면 바로 중국으로 가겠습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자신 있게 대답했다.


면접 결과는 합격, 小기업 커리어의 시작점이었다. 세상 일들은 가끔 예상하지 못한 아주 작은 일이, 미래의 큰 방향을 결정해버리고는 한다. 나는 외로운 유학생활을 견디며 20대에 8년을 쏟아부은 노력으로 미래의 방향이 결정될 수 있도록 끝까지 나 자신을 위한 결정과 노력을 멈추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의 결실이 배신당하는 것을 눈앞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중국 유학을 시작한 20살부터 취업의 순간까지, 나는 열심히 공을 골문까지 몰고 왔다. 그러나, 정작 스트라이커인 27살의 나는, 뒤돌아 우리 골문을 향해 자살골을 넣고 말았다. 


나의 인생의 27번은 다른 등번호 선수들에게 원망을 받는다. 




이십 대의 중요했던 순간들을 되돌아보며 많은 시간을 생각에 잠겼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는 마치 서로 다른 사람인 것처럼 가치관의 일치를 이뤄낼 수 없다. 특히 미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선택들에 대한 가치관은 매우 달라, 글을 쓰는 동안 이 이야기가 과연 내 이야기인지 의심이 들기도 했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나란 무엇인가'에는 '분인'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분인'은 대인 관계마다 드러나는 다양한 자아를 정의하는 용어다. 나는 사십 대의 나와 이십 대의 나를 전혀 다른 사람으로 정의할 수밖에 없다. 과거의 나는 젊음을 무기로 한 자신감으로 마음껏 독특한 삶을 살았다면, 현재의 나는 가족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가치관으로 무장해 전쟁 같은 삶을 살아간다. 이처럼, 나라는 존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첫 취업, 이후의 현실은 냉혹할 수밖에 없었다. 

나비의 날갯짓이 감당할 수 없는 파도를 만들어 낼 줄 미처 몰랐다. 


(중국유학 + 베이징졸업 + 한국취업) = 대기업?

(중국유학 + 하얼빈편입 + 한국취업) = 대기업? 중견기업? 중소기업?

(중국유학 + 하얼빈편입 + 중국취업) = 악마개가 쥐를 잡아먹는 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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