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살아남기-살아가기
고려대학교 여성주의 교지 석순石筍 61집에 총총이라는 필명으로 실은 글입니다. 석순은 캠퍼스 곳곳에 오프라인으로 배포됩니다.
여자들이 자꾸 죽는다. 죽임을 당한다. 작년 9월에 발생했던 신당역 여성노동자 스토킹 살인 사건 이후 여자들은 분노하고 절망하고 변화를 부르짖었음에도 지난 8월 신림동의 한 공원에서 한 여성이 대낮에 모르는 남성으로부터 강간과 살해를 당했다. 신당역 이전에는 노원 세 모녀 스토킹 살인 사건이 있었고, 또 그전에는 강남역 여자화장실 여성살해가 있었다. 그 전에도 후에도, 그 와중에도 여자들은 죽임을 당했다. “단 한 명의 여성도 잃을 수 없다”는 구호를 외치는 우리의 마음은 매번 처음만큼이나 처절하지만, 이런 죽음이 수없이 반복되도록 어째서 여성살해 통계는 찾아볼 수조차 없는 것일까.
한국여성의전화 언론보도 집계에 따르면 친밀한 관계[1]에 있는 남성 상대자에 의한 여성 살인(미수) 피해자만 해도 지난 일 년 동안 최소 372건으로, 하루에 한 명이 넘었다(2023). 오마이뉴스가 2016년부터 2018년, 법원 판결문을 분석하여 집계한 ‘교제살인’ 중 남성이 여성을 살해한 사건은 108건으로 열흘에 한 명꼴에 달했다(2020.11.09). ‘남자에 의해 죽거나 다친 여자들에 대한 아카이브’를 표방하는 인스타그램 계정 “죽거나 다친 여자들”에는 2021년 9월부터 2022년 12월 사이 230개의 기사 아카이빙 게시물이 업로드되었다.
이런 현실에 비해 여성가족부와 경찰청은 관련 통계를 내놓기는커녕 ‘여성혐오범죄’, ‘교제살인’ 등의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도 꺼리는 것으로 보인다. 2023년 6월에 발표된 「2022년 성폭력 안전실태조사 연구」(이하 안전실태조사)의 성폭력 피해경험 유형별 피해 실태 중 여성의 피해경험률이 압도적으로 높은 ‘강간(미수포함)’ 항목에 대한 가해자 성별조차 나타나 있지 않으며, 강간살인이나 여성살해와 같은 범죄의 실태에 대한 통계자료는 전무한 상황이다.[2] 조각난 채 이곳저곳에 떠다니는 정보를 모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안전실태조사의 강간 피해 유형에서 정의하는 강제 성관계는 ‘성기삽입’으로 특정되어 있으므로 해당 유형의 가해자 성별은 남성이겠거니 할 뿐이다.[3]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대검찰청 「범죄분석」의 내용을 살피며, 강력범죄의 남성 피해자 건수가 여성 피해자 건수의 두 배에 육박하는데 성폭력범죄가 포함된 강력범죄(흉악) 항목에 대해서만 여성의 피해자 건수가 남성의 피해자 건수보다 7배가 많은 것을 보고 아하,
그럼 그렇지,
할 뿐이다.
이렇게나 단단하게 존재하는 여성혐오라는 현상을—현실을—국가와 사회가 외면하기 때문에 우리는 숫자로나마 이들의 죽음을 기록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숫자를 근거로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며 여성가족부를 폐지하겠다는 정부에 맞서 현실을 명확히 진단하고 대응책을 마련할 것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확한 통계는 정책 수립을 위한 자료가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의 죽음이 통계만으로 기억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신림동 여성살해 피해자를 추모하기 위해 모인 시민들이 “[이러한 사건이] 너무도 자주 일어나 특정 사건을 언급하기 어려울 정도”라며 구조적 여성혐오에 대한 피로를 호소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단 한 명의 여성도 잃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인다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박정원, 2023). 우리는 이 숫자들을 차곡차곡 모아 통계를, 정책을, 변화를 요구할 것이지만, 동시에 신림동이라는 글자를, 신당역이라는 글자를, 강남역이라는 글자를 읽을 때 목구멍에서 뜨겁게 올라오는 것을 삼킬 것이다.
미국의 시인이자 작가인 클로디아 랭킨은 미국에서 발생하는 흑인을 향한 인종차별 범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흔한 개의 총성은 결코 더해지지 않으며, 복수화되지become plural 않는다. 과거에 머무르지 않는다. (…) 나는 때로 하나하나의 목숨을 그렇게 아끼는 일이, 누군가 죽을 때마다 허리가 휘어지도록 그 상실을 겪어내는 일이 감상적이거나 지나치다고, 확실히 지적이지는 않으며 오히려 나이브하거나 자학적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 [그러나 김명미는] 경련을 일으키고, 턱 막히고, 배를 부여잡고, 맨살에 손을 갖다 대고 고통을 붙잡아야만 할 수도 있다고, 거기서 그 고통을 해석할 수도 있다고 했다. (클로디아 랭킨, 2004)[4]
복수화되지 않은 채 나날이 커져가는 이 숫자를 마주할 때마다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휴대전화를 끄기. 혹은 켜기.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울기. 공중화장실에 들어가지 못하기. 일기를 쓰기. 시위에 나가기. 자취방의 잠금장치를 보강하기. 투표하기. 위치추적 앱을 깔기.[5] 친구의 안부를 묻기. 몇 날 며칠이 지나도록 문밖으로 나가지 못하기. 절망. 분노. 우울. 두려움. 혼란. 무기력. 무감각. 울분. 체념. 감상적이거나 나이브하거나 자학적일지도 모르는 이 감정들은 어쩌면 달리 말할 수 없는, 숫자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이 모종의 고통을 붙잡으려는 시도일 것이다. 고통을 붙잡아 해석하려는 시도일 것이다.
절망하고 단념한, 분노하고 우울한, 겁에 질린, 무감각한, 죽을 것 같은, 죽이고 싶은, 죽임당할 바에는 죽어버리고 싶은 우리에게 쓴다. 복수화되지 않지만 여전히 커져가는 이 숫자는 비밀번호다. 낮은 목소리로 서로에게 속삭이는 주문이자, 잊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아무도 모르는 이 숫자를 우리는 알고 있다. 대통령도, 언론도, 경찰도 외면하는 이 숫자를 우리는 매일 센다. 몇 년 몇 월 며칠, 나의 당신이 죽었습니다. 몇 년 몇 월 며칠, 나의 당신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비밀의 공모자다. 우리는 조금씩, 그러나 알고 있다. 우리가 기록하는 것은 숫자이지만 기억하는 것은 사람이다. 숫자는 커지지만 사람은 늘 사람으로서, 상실은 늘 상실로서 존재할 뿐이다. 복수화되지 않은 채 고통을 재생하고 누적할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몰아치는 감정들 속의 고통을 붙잡아 해석해 내야만 한다. 그래야만 내일로 나아갈 수가 있다.
마이테 칸테로-산체스는 “끝나지 않는 참사 속에서의 애도와 슬픔은 어떻게 행해지는가?”를 물으며, 폭력적인 사회 구조에 의해 언제라도 찾아올 수 있는 죽음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상실에 대응하는 태도는 애도보다 오히려 경야[6]에 가깝다고 말한다(2018). 여성을 혐오하는 국가와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으로서 우리의 삶은 언제나 죽음과 함께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한 여성의 죽음을, 그 한 명의 삶을, 온전히 그 하나로 차마 애도할 수 없다. 끝나지 않는 참사 속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다. 그 죽음은 종결되지 않는다. 그 죽음은 분노와 절망을, 불안과 무력함을 남기며, 참사가 끝나기 전까지는 또 다른 죽음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럼에도, 애도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의식적이고 적극적인 슬픔이 필요하다. 윤조원은 “정치를 가능하게 하는 윤리적 바탕으로서”의 슬픔의 힘을 강조하며 고통을 공유하는 이들이 “애통의 다른 언어”를 찾아낼 것을 제안한다(2017). 이처럼 나는 우리의 분노와 절망과 불안과 무기력이 거름이 되어 마침내 우리가 슬픔에 다다르기를 바란다. 우리가 상실에 대해 슬픔으로 반응할 수 없는 데에는 국가와 사회의 거대한 폭력성이 있음을 인지하고, 적극적으로 또 의식적으로 슬퍼함으로써 이 폭력성에 저항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이 죽음에 대해 분노해야 하기에 그저 슬퍼만 할 수는 없고, 이 죽음은 우리를 절망하게 하기에 그저 슬퍼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슬퍼하기를 포기하지 않기를 바란다. 애도를 통해 슬픔의 행위자가 되어 “애통의 다른 언어”를 발화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용기 내 신당역 화장실 앞에 국화 한 송이를 두고 올 수도 있다. 혹은 당신의 죽음을 잊지 않겠노라고 SNS에 한 마디 포스팅할 수도 있다. ‘이게 아닌데’라고 머릿속으로 생각하면서도 입으로는 친구에게 늦은 시간에 돌아다니지 말라고 타박하거나 자기방어술 원데이 클래스를 신청할 수도 있다. 감상적이고 지나치고 지적이지 못하고 나이브하며 자학적이기까지 하다고 한들 그러한 방법으로나마 우리의 고통을 붙잡아 해석할 수 있다면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지속되기를 바란다. 나는 우리가 두렵다고 말하고, 절망한다고 말하고, 분노한다고 말하며, 다만 애도의 말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을 간청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말로는 도무지 담아낼 수 없기에, 그러나 이밖에는 달리 말할 수 없기에 우리가 날것으로 벼려내고 있는 슬픔의 언어를, 있는 힘껏 사용해 주기를 바란다.그리고 먼 훗날, 마침내 지금의 당신이 죽었을 때, 그 소식이 나에게 찾아오지 않기를 바란다. 당신이 그저 어떤 안타까울 수는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죽기를, 다만 그 이유가 당신이 여자라서는 아니기를 바란다. 그날이 오면 나는 당신의 죽음을 모를 것이며 구태여 찾아내어 애도하지 않을 것이다. 애도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전략) 그리하여 우리는 해가 뜨는 것을 두려워하고
머무르지 않을까 하여
해가 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아침에 뜨지 않을까 하여
배가 부른 것을 두려워하고
소화불량이 올까 하여
배가 비어 있는 것을 두려워하고
영영 먹지 못할까 하여
사랑받는 것을 두려워하고
사랑은 사라지기 마련이므로
홀로 있는 것을 두려워하고
사랑은 돌아오지 않으리니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우리의 말이 들리지 않을 것 같아
환영받지도 않을 것 같아
하지만 우리가 침묵할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두려워한다
그러니 차라리 말하는 것이 낫다
기억하며
우리는 결코 살아남지 않아야 했음을.
오드리 로드, <생존을 위한 호칭기도> 중[7]
[1] ‘친밀한 관계’는 애인이나 배우자 등의 관계를 칭한다.
[2] 성폭력 유형 중 ‘PC, 휴대전화 등 통신매체를 이용한 피해’, ‘불법촬영 피해’, ‘촬영물이나 허위영상물 등의 유포 피해’ 항목에 대해서는 가해자 성별 항목의 비율이 명시되어 있으며, ‘성기노출 피해’, ‘성추행 피해’, ‘강간(미수 포함) 피해’ 항목에 대해서는 가해자 성별 항목이 존재하지 않는다. 전화문의 결과 해당 항목에 대해서는 가해자 성별이 조사되지 않았다고 한다. (여성가족부(2023), 「2022년 성폭력 안전실태조사 연구」.)
[3] 물론 외부성기만을 기준으로 성별을 판단할 수는 없다.
[4] 랭킨의 대표작인 Citizen: An American Lyric의 VI에는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사망한 흑인의 이름이 적혀 있다. 해당 페이지는 책의 출간 이후 사망한 흑인의 이름이 포함되도록 지속적으로 판본이 업데이트되고 있다. (Chu, Andrea Long (2017), “Study in Blue: trauma, affect, event,” Women & Performance, 27:3, 306.)
[5] 위치공유앱 ‘자가트(전: 젠리)’의 일일 사용량은 지난 7월에 발생한 오송 지하차도 참사 당일 급증, 이후 오송 참자 이전과 같은 수준으로 하락한 뒤 신림역 흉기난동 이후 다시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한국일보(2023), “너도나도 ‘위치공유앱’ 까는 청년들… ”사생활보다 안전 먼저””, 2023.08.02.)
[6] 경야經夜란 “죽은 사람을 장사지내기 전에 근친지기(近親知己)들이 널[棺] 곁에서 밤새도록 지키는 일“을 의미한다(두산백과).
[7] 참고문헌 중 원문이 영어인 것은 필자가 직접 번역하여 인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