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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수나 Aug 21. 2023

에코리더

4

   휴일이고 날씨도 좋았다. 아이를 유모차나 자전거에 태우고 나온 여자들이 나무 그늘이 풍성한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 앞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갔고, 그녀들은 우리를 흘끗 바라볼 뿐이었다. 

   부동산과 피자 가게, 분식점이 들어선 아파트 상가를 지나, 동간 사이에 있는 분리수거장을 요령 있게 찾아냈다. 조경이 잘된 정원 사이 반듯하게 깔린 보도블록 위로 카트가 탈탈 굴렀다. 아무도 카트에 상자를 싣고 폐건전지를 수거하러 다니는 두 여자에게 관심 두지 않았다.

   이젠 영인이 먼저 수거함을 발견하고 달려갔다. 경비의 허락 같은 건 필요 없다는 듯 거리낌 없이 수거함을 열고 건전지를 긁어냈다. 나 역시도 건전지를 담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라 여유롭게 뒤따랐다. 하지만 예측 못 할 일들 때문에 가끔 지체되곤 했다.

   오랫동안 수거해 가지 않은 건전지는 녹슬고 잔뜩 부풀어 있었다. 심지어 끈적끈적한 검은 진액을 토해 내기도 했다. 이게 뭐야? 내가 목장갑 낀 손에 묻은 검고 끈끈한 액체를 털어 내며 질겁했다. 영인이 오래된 건전지 안의 전해액이 녹아 나온 거라고 덤덤하게 말했다. 건전지가 고형의 물체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내장이나 피를 쏟아 낸 작은 생물처럼 보여 섬뜩했다.      

   “회사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하면서 살면 안 될까?”

   어느 날, 퇴근한 딸이 제 방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나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그때 나는 식탁 의자를 벽에 밀어 놓고 부엌 바닥에 앉아 커다란 양푼에 배추를 절이고 있었다. 배추 대신 딸의 속을 조금이라도 들여다봤다면 어땠을까. 직장이 무슨 취미로 다니는 거냐고, 그럴 거 같으면 그 어려운 공부는 왜 했냐, 고 단번에 잘라 버리지 않았을 거다.

    수거함은 간혹 반항이라도 하듯 굳게 닫혀 열리지 않았다. 영인이 악착같이 고리를 당겨 열어젖히자, 숨겨 뒀던 악취가 터져 나왔다. 녹물의 비릿함과 과일의 썩은 내 같은 들큼함, 곰팡이의 퀴퀴함이 한데 섞인 기분 나쁜 냄새였다. 누군가 수거함을 은밀하게 다른 용도로 활용한 결과였다. 영인은 건전지 사이로 기척 없이 숨어 있는 비닐봉지를 찾아 솎아 냈다. 비닐 속에는 여지없이 물방울이 맺혀 있었고, 얼음이거나 아이스크림이었던 흔적이 주황색 혹은 푸른색 액체로 고여 있었다. 과자 부스러기가 담긴 봉지를 들추자 노란 곰팡이 가루가 푸수수 날렸다. 난 뒤돌아서서 눈물과 콧물이 섞인 재채기를 연거푸 쏟아 냈다. 영인은 허리춤에 매달린 가방에서 비닐봉지를 꺼내 쓰레기들을 따로 담았다. 

   복도 끝에 있는 비상계단에서 팀장과 거래처 직원이 수상쩍은 만남을 하고 있었다. 그때 비상구의 문을 연 건 딸이었다. 팀장은 딸에게 봉투를 찔러줬지만, 딸은 받지 않았다. 그 뒤로 커피를 타다, 이전에 없던 일일 보고를 하다, 딸은 동료들 앞에서 질책 당했다. 어느 날은 독감에 걸려 고열에 시달리는데도, 조퇴시켜 주지 않았다고 장례식장을 찾은 딸의 동료가 말했다. 회사에서는 한마디 사과는커녕, 엄마인 나조차도 만나주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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