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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수나 Aug 21. 2023

에코리더

3

   카트를 끄는 내게 미안했는지 영인은 아파트가 잘 관리되었다, 살기 좋겠다, 같은 말을 늘어놓았다. 그런 이야기를 하며 다음 동으로 옮겨 가는 길이었다. 

  건전지 말이야, 하고 내가 말을 꺼냈다. 

   “보통 리모컨 같은 데는 네 개 정도 들어가잖아. 손전등이나 장난감 같은 건 적어도 두 개는 들어가고. 근데 하나만 들어가는 물건은 없더라고. 그래서 건전지를 교체할 때, 이걸 다 갈아야 하나, 고민하게 돼. 그중 어떤 건 더 쓸 수도 있잖아. 배터리 잔량을 알아보려고 어릴 때는 건전지에 혓바닥을 다 대 봤다니까.” 

   “건전지 측정기 있어요.”

   영인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기계에 건전지를 끼워서 초록 불로 눈금이 가면 더 써도 되고, 빨간불이면 교체해야 해요. 그걸 알려 주는 그런 거 있어요.”

   “그런 게 있구나.” 

    나는 잠시 머쓱해 말끝을 흐렸다. 그때 영인이 불쑥 내뱉었다.

   “우리 협회 대표님 퇴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래서 제가 폐건전지를 수거하는 거예요.”

  영인은 간판에 환경을 내세운 단체에서 일했다. 협회는 지방 선거에서 유력 인사의 선거 운동을 도왔다가 환경 단체가 정치 운동을 한다는 구설에 올랐다. 대표가 사퇴하고, 부랴부랴 지역의 퇴임 교장을 대표로 영입했다. 선거철이 지나고 소문이 잦아들 때쯤 되자 부대표는 노골적으로 대표를 무시했다. 이미 직원들은 부대표를 중심으로 자신들끼리만 공유하는 라인업을 만들었다. 대표는 1년 남짓한 시간을 보내고 퇴장할 처지였다.

  대표는 꽤 조심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는 직원들의 업무에 대해서는 일절 간섭하지 않았다. 직원들의 고유 영역을 잘못 건드렸다가 어떤 역공이 있을지 몰랐으니까. 대신 환경을 위한 봉사나 친환경적인 삶의 태도 같은 것을 물고 늘어졌다. 

  대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직원들을 모아 놓고 ‘환경을 위해 에코리더로서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훈시했다. 누군가를 가르치고 훈계하는 일을 평생 업으로 삼았던 그였다. 그로서는 이런 것들이 유일하게 자신의 자리를 확인하는 방법이라고 영인은 말했다.

  영인은 오랫동안 협회 내에서 이렇다 할 프로젝트를 맡지 못했다. 협회의 실세인 부대표는 ‘상황 봐서’라는 말로 그녀를 제외했다. 하지만 그녀가 신경 써야 할 것은 부대표의 상황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상황이었다. 

   전날 영인이 서둘러 사무실을 나서는데 뒤통수가 후끈했다. 부대표는 마지못해 조퇴 허가를 내주며 빈정댔다. 

   “남편이 참, 오래도 병원에 있네.” 

   영인의 남편은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음주운전 사고였는데,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였다. 그는 술에 취해 마트를 들이받았는데, 그때 혈중 알코올 농도가 0.03%로 면허가 정지됐고, 다리가 부러졌다.

   영인에게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라 속으로 좀 놀랐다.      

   며칠 전이었다. 남편이 퇴근할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냉장고가 텅 비었다는 걸 알았다. 나는 머리카락 깊숙이 손을 집어넣어 둔중한 머리를 꾹꾹 눌러 댔다. 그리곤 다음 상담 때는 꼭 약을 바꿔 달라야겠다고 생각하며 장을 보러 나섰다.

   찬바람에 머리도 깨울 겸 아파트 건너 주택가에 있는 마트로 갔다. 그런데 마트의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장사를 안 하는 것도 아닌데, 가게 물건을 밖으로 계속 빼내고 있었다. 한쪽 벽면을 채웠던 야채용 냉장고가 사라진 자릴 보니, 조립식인 마트 벽 한쪽이 통째로 사라지고 없었다. 벽 대신 투명한 비닐 막이 밖과 안을 구분할 뿐이었다. 계산대에 장 본 걸 올려놓으며 직원에게 넌지시 마트가 이사 가냐고 물었다. 

   “웬걸요. 새벽에 음주운전 차가 마트를 들이박았어요. 다행히 사람이 없을 시간이라 다친 사람은 없어요.” 

   당구장을 하는 영인의 남편은 자기가 버는 돈보다 훨씬 많은 돈을 카드로 긁었다. 그러면서 틈틈이 사고를 쳤다. 코인 불법 다단계에 손을 댔고, 이번엔 음주운전이었다. 

   그런 영인에게 부대표가 직무를 미끼로 돈을 요구했다. 그녀는 부대표가 말 한 오백 같은 건 먹고 죽으려도 없다며 한숨을 길게 쉬었다. 그리고 결심했다고 했다. 대표가 퇴임하기 전에 진짜 에코리더가 되어 보자, 폐건전지 수거 캠페인에서 우수 직원 표창을 받으면 시 산하 환경 단체의 보직을 받을지도 모른다. 결의에 차서 그런지 영인은 조금 눈물을 내비쳤다. 그런 영인을 보며 나는 그녀가 자신이 쓸 수 있는 에너지의 총량을 이미 넘어선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내게 남아 있는 에너지의 잔량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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