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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가 열리고 집 앞이었다. 도어락의 번호 키를 누르려는데 손가락이 허공에서 멈췄다. 남편이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바꾸라고 했지만 듣지 않았다. 딸을 잊고 싶지 않았다. 난 집 안으로 들어가기 전 치르는 의식처럼, 얼마간 고개를 떨어뜨리고 그 자리에 묵묵히 서 있었다. 그리고 딸의 생일인 1105를 되뇌며 천천히 번호를 눌렀다.
문이 열리고 집 안으로 들어서는데, 등 뒤에서 음악 소리가 들렸다. 잘못 들었나 했는데, 멜로디가 또렷했다. 악기 소리라기보다는 전자음에 가까웠다. 되돌아서 현관문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소리는 멈췄지만, 도어락 주변으로 여운이 맴돌았다. 오작동인가? 잠시 멍하니 서 있다, 집으로 돌아온 이유를 떠올리며 부리나케 거실을 가로질렀다.
창고 구석에 세워 뒀던 카트를 끌어내고, 재활용 쓰레기를 담아 놨던 상자를 뒤집어엎었다. 깨진 스티로폼 접시와 우그러진 페트병, 비닐봉지 뭉치, 납작하게 눌린 종이 상자들이 베란다 바닥에 흩어졌다. 그것들을 대강 발로 구석에 밀어 놓고, 카트에 연결된 갈고리 줄을 당겨 빈 상자를 고정했다. 그리고 현관으로 나오면서 신발장 안에 있는 목장갑 두 개를 꺼내 상자 안에 던져 넣었다.
영인은 여전히 경비실 앞에 서 있었다. 어쩌다 보니 내가 앞에서 카트를 끌고 영인이 뒤를 따랐다. 내가 사는 아파트이기도 하고 카트의 주인이기도 해서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영인은 내가 건네준 목장갑에 천천히 손가락을 끼워 넣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파트 단지는 모두 열 개 동이었다. 정문 경비실 뒤로 부챗살처럼 101동을 시작으로 110동까지 늘어서 있었다. 내가 사는 동은 왼쪽의 101동을 맨 앞으로 봤을 때, 네 번째였고, 우리의 다음 목표지였다. 산을 깎고 들어선 아파트 단지라 소나무나 전나무를 대신해 건물들이 산등성이에 주르르 서 있는 것 같았다. (913)
아침마다 호우 주의 안전 문자가 안부처럼 날아왔다. 아마 이 년 전 여름이었을 것이다. 거미줄처럼 늘어지던 빗줄기를 바라보다 오후가 돼서야 우산을 찾아 들었다. 연못은 알맞게 찰랑거릴 터였다. 목적지는 산 아래 연못이었지만 아파트 단지를 둘러싼 연두색 울타리를 따라 제일 높은 지대로 올라갔다. 울타리와 산자락이 겹치는 곳에 한 사람쯤 빠져나갈 틈이 있었고, 그곳을 빠져나가면 가파른 산길이었다. 아파트 정문을 우회하면 연못으로 가는 평탄한 도로가 있었지만, 난 그 길을 고집했다.
산봉우리와 산봉우리 사이에 고인 듯 자리 잡은 연못은 산기슭을 타고 내려간 흙탕물의 마지막 종착지였다. 폭우로 급조된 도랑과 불어난 계곡의 물은 빠르게 산 아래로 내달리곤 했다. 맹렬한 속도로 밀어닥치는 흙탕물 소리가 간혹 울컥대는 소리로 들렸다.
산을 따라 내려오는데 가늘던 빗줄기가 굵고 묵직해졌다. 산모퉁이를 돌아 외길로 들어서는데 낯선 여자와 맞닥뜨렸다. 빗속에 산을 오른 여자가 나 말고도 또 있구나, 그게 영인이었다. 어깨 위로 걸친 우산 안쪽이 검은 동굴의 입구처럼 보여, 막 동굴 속에서 걸어 나오는 것 같았다.
둘은 한동안 마주 보고 서 있었다. 길 안쪽은 산비탈이고, 바깥쪽은 계곡 아래로 이어지는 절벽이었다. 보통 때라면 서로 비껴갈 수 있는 길이었지만 둘 다 폭우에 도움도 안 되는 우산을 쓰고 있었다. 게다가 길 가장자리는 비에 조금씩 허물어져 내렸다. 내가 체념하듯 먼저 우산을 접자 그녀도 따라 접었다. 작고 마른 체격의 사십 대 초반의 여자라는 것 말고는 특별한 것이 없어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녀가 내 앞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다 휘청했다. 나는 재빨리 그녀의 팔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