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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6월, 해는 높아서 정오였다. 영인은 정문 옆 경비실 앞에서 쏟아지는 햇볕 아래 서 있었다. 시선이 바닥으로 향해 있어 선 채로 조는 것처럼 보였다.
기척을 느꼈는지, 영인이 고개를 들었다. 무표정하던 얼굴에 흐릿한 웃음이 번졌다. 양손에 든 것 없이 손바닥만 한 가방을 사선으로 메고 있어, 잠깐 놀러 온 사람처럼 보였다.
“아파트에서 모아 둔 폐건전지 좀 가져갈 수 있을까요?”
“그건 왜?”
“협회에서 폐건전지 수거 캠페인을 해서.”
수거함에 잘 모아 둔 걸 협회로 가져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둘 사이에 잠깐 정적이 흘렀다. 영인이 말간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난 떠밀린 것처럼 경비실 창을 두드렸다.
열리다 만 창문으로 세로로 잘린 경비의 얼굴이 나타났다. 틈새로 라면 냄새가 훅 끼쳤다. 수거함에 있는 폐건전지를 가져가도 되냐고 물었다. 한쪽만 보이는 경비의 눈에 의혹의 빛이 스쳤다. 나는 재빨리 영인을 끌어당기며, 이 친구가 환경 협회에서 일하는데, 폐건전지 수거 캠페인을 해서요, 라고 덧붙였다. 경비는 그제야 창문을 활짝 열고 영인을 훑어봤다. 그러더니 갑자기 나긋해져 그러세요, 했다.
수거함이라고 생각했던 경비실 앞 녹색 상자엔 폐건전지가 없었다. 대신 백색 광선검 같은 기다란 형광등과 전구가 들어 있었다. 나는 왠지 SF 영화처럼 정체 모를 괴물들을 향해 형광등을 챙강챙강 휘두르고 싶어졌다. 하지만 밖의 상황이 궁금했던 경비가 나옴으로써 나의 상상은 거기서 끝나 버렸다. 경비는 나와 영인을 힐끗 보더니, 경비실 뒤로 돌아가 분리수거장 한구석에 놓인 작은 연두색 상자를 가리켰다. 상자 윗면에 저금통처럼 네모난 구멍이 나 있었다. 거기로 폐건전지를 집어넣는 모양이었다.
허리를 굽혀 상자 앞면에 있는 작은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새끼손가락만 한 원기둥들이 콘크리트 바닥으로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영인이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원기둥 사이로 네모 납작한 검은 물체가 섞여 나뒹굴었다. 핸드폰 배터리였다. 멀찍이 서 있던 경비가 검은 봉지를 들고 오더니, 그건 자기가 따로 챙겼다.
영인이 손바닥만 한 가방에서 역시 한 줌밖에 안 되는 휴대용 장바구니를 꺼내 폈다. 나는 수거함 앞에 쪼그리고 앉아 통속 깊숙이 손을 넣어 나머지 건전지들을 후벼 냈다. 건전지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영인이 콘크리트 바닥을 구르는 건전지들을 따라 뛰었다. 그러고는 그것들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영인이 허리를 펴고 일어서자 건전지로 바닥을 채운 장바구니가 밑으로 불룩하게 쳐졌다. 그 정도면 되겠냐고 묻자, 영인은 대답도 하지 않고 아파트 단지를 휘 돌아봤다. 그러더니 전부 몇 세대냐고 물었다.
“설마 천오백 세대에서 나온 건전지를 다 가져가게?”
“가능하면.”
영인의 장바구니가 어이없었다.
그녀를 경비실 앞에 세워 두고 집으로 갔다. 천오백 세대에서 나온 폐건전지를 담을 박스와 그걸 싣고 다닐 카트를 머릿속으로 떠올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