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가 전부가 아닐 때, 삶은 더 깊어진다(?)

아날로그 세탁기 앞에서 배우는 느림의 미학

by 김찐따

빨래는 그냥 버튼 하나 누르면 끝 아닌가요?

한국에서 빨래는 너무나도 간단했다. 세탁기 문을 열고 빨랫감을 넣은 뒤 버튼 하나만 누르면 끝이었다. 세탁부터 헹굼, 탈수까지 자동으로 진행됐고, 건조기에 넣으면 하면 금세 뽀송뽀송한 옷이 완성된다.


우리는 과정 없이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세탁도 마찬가지였다. 과정은 눈에 보이지 않았고, 내가 할 일은 그저 건조기에서 옷을 꺼내 곱게 개어 넣는 것뿐이었다. 빨래는 내 일상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었다. 그냥 '해야 하는 일'이었고, 거기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본 적도 없다.



차고에 놓여 있던 낯선 세탁기

차고에 있던 아날로그식 2통 세탁기


발리에 온 후, 새로 이사한 집 차고에 세탁기가 한 대 놓여 있었다. 멀쩡한 세탁기가 하나 있으니 반가웠지만, 그냥 뭔가 이상했다. 3주 동안 지내며 힐끗힐끗 지나치듯 세탁기를 보았지만, 일단 익숙한 형태가 아니었다. 우리가 아는 드럼 세탁기나 통돌이 세탁기가 아닌, 두 개의 작은 통으로 나뉜 플라스틱 세탁기. 버튼도 없고, 다이얼이 몇 개 붙어 있을 뿐이었다. 설명서도 없었고 일단 형태적으로 너무 생소했다. 낯설기도 하고 뭔가 괜히 복잡해 보여 눈에 안 밟혔나 싶다.


사실, 발리의 런드리 서비스가 워낙 저렴하기도 해서 '빨래'가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1kg당 몇천 원이면 깔끔하게 세탁하고 다림질까지 마친 옷을 받을 수 있다. 아이와 나, 단둘이 생활하다 보니 세탁물도 많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엔 그냥 무시했나 보다. 낯선 것에 도전하는 것보다는 맡기는 게 더 편하니까.


그렇게 한동안 방치해 두다가, 어느 날 문득 '한 번 써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호기심 반, 실험 정신 반으로.



아날로그 세탁기와의 첫 만남

아날로그 세탁기 구조 공부


자.. 일단 처음엔 열심히 구조부터 살펴봤다. 이 녀석을 열심히 탐구한 바에 의하면, 왼쪽 통은 세탁칸, 그리고 오른쪽 통은 탈수칸이다. 왼쪽 방향부터 세탁 시간을 조절하는 다이얼, 물을 받을 수도 버릴 수도 있는 다이얼, 물을 넣을 통을 선택하는 다이얼, 마지막으로 탈수시간을 설정하는 다이얼이 있었다.


보통의 세탁기처럼 자동으로 세탁-헹굼-탈수가 한 번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매 단계마다 손을 써야 했다. 세탁통으로 수도꼭지를 틀어 물을 채우고, 세제를 넣고, 다이얼을 돌려 세탁 시간을 설정한다. 세탁이 끝나면 다시 물을 빼고, 물을 채우고, 섬유유연제를 넣고, 헹구고 또 헹군다. 만족할 만큼 헹굼을 한 후 다시 물을 빼고, 빨래를 다시 탈수칸으로 옮겨야 한다.


처음에는 마냥 당황스러웠다. 세탁기가 아니라 일종의 실험기계처럼 느껴져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하는 건지 난감했다. 물을 받으려고 수도를 틀었다가 물 속도 조절 실패로 호스가 빠져 옷은 홀딱 젖고, 바닥은 물바다가 되었다. 그리고 헹굼의 선택도 한 번할지 두 번 할지는 나의 선택에 달려있었다. 세탁시간을 맞춰놓고 나면 다시 집에 올라갔다가 얼추 시간에 맞춰 내려와서 다시 물을 빼고, 수도꼭지로 물을 다시 받고... 모든 과정을 번거롭게 반복해야 하는, 일종의 수행 미션 같았다.



느림의 불편함 속에서 발견한 것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나는 점점 이 아날로그 세탁기에 적응해 갔다. 물을 받을 때는 호스를 단단히 고정해야 하고, 헹굼을 충분히 하려면 물을 3번 정도 갈아주고 헹궈줘야 한다. 탈수를 하려면 빨래를 직접 옮겨야 하니, 어느 정도 물기를 짜고 옮기고, 짠 빨래는 탈수기에 최대한 펼쳐서 차곡차곡 넣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것도 알았다.(그냥 대충 짠 상태로 빨래를 탈수통에 쌓아 넣었다가 무게 하중이 안 맞아서 그런지, 흔들흔들 춤을 추며 얼굴을 돌리는 세탁기를 몇 번이나 보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과정을 반복하는 나를 보며 약간은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생각하며 어이가 없다가도, 그 과정을 해내는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자동 세탁기를 세탁기를 사용할 때는 그저 버튼을 누르고 결과를 기다리면 됐다. 하지만 이곳에서 나는 세탁물을 하나하나 뒤져가며 빨래 상태를 확인하고, 정확한 세제의 농도를 맞추고, 물의 양도 조절해야 한다. 처음에는 귀찮았지만 어느 순간 '내가 정확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난 빨래를 하고 있었지)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기술의 발전하면서 인간이 과정을 생략하고 결과만을 받아들이게 된다고 말했다. 기술은 우리의 삶을 단순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존재'에 대한 감각을 흐리게 한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세탁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버튼 하나만 누르면 빨래가 '완성'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과정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진행된다. 세탁조가 돌아가고, 물이 채워지고, 세제가 퍼지고, 헹굼과 탈수가 반복되며, 옷은 조금씩 깨끗해진다.


하지만 우리는 이 과정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렇지 굳이 둘 필요가 없지) 그런데 이 아날로그 세탁기를 사용하면서, 나는 다시 빨래를 '직접 경험'하게 됐다. 마치 농부가 흙을 만지고 씨앗을 심듯이, 나는 내 손으로 물을 채우고, 세제를 넣고, 손으로 만져 옷감의 상태도 확인한다 . 불편하긴 해도, 내 손을 직접 움직이며 직접 과정을 통제하는 감각이 묘하게 만족스럽다.


문득 한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집안 살림에 누가 더 기여하는가에 대해서 (전) 남편과 토론하다 "그래도 빨래는 내가 돌렸어!"라고 말하는 남편에게, "빨래를 네가 돌렸냐? 세탁기가 돌렸지?"라고 맞받아 쳤던 기억. (진짜 유치했다) 근데, 진짜 세탁기가 돌린 게 맞다. 빨래에도 엄청난 과정이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다.



속도가 전부가 아닐 때, 삶은 더 깊어진다

우리는 늘 빠름을 추구한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더 많은 것들이 자동화되고, 시간을 아끼는 것이 곧 삶의 질을 높이는 것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속도가 전부가 아닐 때, 삶은 더 깊어진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과정을 누가 일일이 경험할 일이 있었을까? 지금 이 시대에. (속도가 전부가 아닐 때 삶은 더 깊어진다. "It is not the speed that matters, but the depth"– Haruki Murakami)


발리에서의 생활은 본래 한국보다 느리다. 행정도(내 1년 비자는 언젠간 나오겠지?), 교통도, 사람들의 태도도. 처음에는 그저 답답하다고 생각했지만 점점 생각이 바뀌어 가고 있다. 느리다고 해서 그게 꼭 불편한 것만은 아니다. 이 아날로그 세탁기를 사용하면서도 나는 결과보다 과정에 집중하는 법을 또 배운다.


빨래도, 발리에서의 삶도 마찬가지다. 때론 답답하고 의미 없어 보일 때도 있지만, 결국 이 모든 순간이 하나의 과정이 아닐까? 서두르지 않아도, 모든 것은 결국 제자리로 흐르게 되어 있다.


그리고, 오늘도 나는 빨래를 한다

오늘도 빨래를 넣고, 물을 받고, 손으로 조절하며 세탁기를 돌린다. 나는 이 세탁기가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뭔가 내가 빨래의 기본에 충실했다는 뿌듯함이 생겼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제는 나름대로 손에 익었다. 호스가 빠지지 않게 수도꼭지 물줄기를 조절하는 법을 터득했고, 이젠 섬유유연제도 빼먹지 않는다. (성장했다!)




내 다음 미션은

세탁기 안에 빨래가 있단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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