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에게 간택을 당했다.

내 삶에 스며든, 노란색 고양이 이야기

by 김찐따

예고 없이 찾아온 고양이 손님

문득 찾아온 인연이란 참 이상한 것이다. 특히 그 인연이 네 발로 걸어와 내 마음속으로 들어올 줄이야.


우리가 사는 주택단지는 늘 조용했다. 입구에는 높은 문이 있었고, 단지를 관리하는 관리인은 문 아래 구명까지 철저히 매워두었다. 이런 곳에서 길고양이를 본다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런 평화로운 단지에 어느 날부터인가 노란 털의 고양이가 출몰했다.


목에는 헐겁게 묶인 낡은 검은색 노끈이 있었고, 피부병으로 머리부터 목까지 털이 듬성듬성 빠져있었으며, 제대로 먹지 못한 듯이 몸이 홀쭉했다. 멀리서 보기에도 그 모습은 고단해 보였다.


그러다 어느 날, 녀석이 보이지 않게 됐다. 아마도 단지를 떠났겠거니 싶었다.



녀석과의 첫 대면

다음날, 차고의 창고에서 물건을 한참 정리하다 휴식을 취하려 캠핑 의자에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였다.


"야옹"

작고 날카로운 울음소리에 놀라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차고에 세워둔 오토바이 뒷자리에는 막 잠에서 깬 듯 나른한 눈의 고양이가 앉아있었고, 졸린 눈을 꿈뻑이며 나와 눈을 맞추고 있었다.


햇빛에 반사된 눈동자는 날카롭게 빛났지만, 어딘가 모르게 애처로움이 묻어났다. 그새 피부병이 더 심해졌는지 등은 잔뜩 헐었고, 귀 주변은 붉게 부어있었다. 자세히 들여다 보고 나니, 더 섣불리 다가갈 수 없었다. 녀석을 만져도 될지 망설여졌다...


몇 번의 고민 끝에 그저 조심스레 얼굴을 슥슥 만져주며 안심을 주고 인사만 건넸다. ‘밤이 되면 또 어디론가 돌아가려나' 그렇게 생각하며 집으로 올라왔다.



결국 우리 집 앞에 터를 잡다

다음날 아침, 커튼을 열자마자 나는 숨을 멈췄다. 현관 앞에 노란 무언가가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어제 그 고양이였다.


밤새 비가 부슬부슬 내렸는데도, 그곳에서 밤을 지새운 듯했다. 결국 우리 집 앞에 터를 잡았구나 싶었고, 그 후로 하루종일 녀석은 우리 집 앞을 떠나지 않았다.

아주 이제 그냥 터를 잡았다

녀석과 마주쳤을 때부터 참 가여운 마음이 들었지만, 쉽게 거둘 수는 없는 개인 사정이 있었다.


이미 주변 이웃들도 여러 번 고양이를 단지 밖으로 내쫓는 모습을 보았고, '애완동물 금지 조항'이 있는 집 계약 때에도 그럴 일 없다며 큰소리치고, 신나게 사인을 휘갈긴 지 겨우 두 달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참.. 그렇다고 계속 말라가는 고양이를 무시할 수도 없는 미칠 노릇이었다.


거기다 이 녀석은 이미 사람의 손을 잔뜩 탄 고양이다. 나와 내 아이만 보면 어디든 쫄쫄 따라다니기 바빴다. 아이가 유치원 갈 준비를 하면 어느새 다리밑까지 다가와 비비적거리고, 단지 대문으로 마중까지 나가는 개냥이였다.


그 모습에 그새 정이 들었는지, 혹시나 그냥 내버려 뒀다가 단지 내에서 굶어 죽으면 어떡하지, 나갔다가 길고양이한테 얻어맞으면 어떡하지 등등 많은 고민의 밤을 보냈더랬다.



결심의 순간....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창밖을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눈으로 녀석을 찾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이렇게 오래 우리 집 앞에 머무는 걸 보면, 어쩌면 이 아이는 우리를 선택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런 걸 간택받았다고 하던데...


그 상태로 일주일 정도 지나서야, 결심이 섰다. 내가 공식적으로 고양이를 키울 수 없지만, 최소한의 도움은 줄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특한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매일 굶고 말라가던 아이에게 밥을 주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위생관리를 위해 내 차고에 고양이 화장실도 구비해 뒀다. 건강을 되찾아 다시 떠나기 전까지 만이라도, 우리 집 차고에서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작은 보금자리도 마련해 주었다.


'이 녀석이 혹시 버려진 걸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단지 옆에는 오래된 동물병원이 있었고, 이곳에 버려지는 고양이들도 많다고 들었다. 다른 집들은 문을 꼭 닫고 천적인 개를 키우고 있었으니, 이 녀석이 머물 곳이라곤 아들과 내가 있는 조용한 우리 집뿐이었을 거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는 세끼 밥을 챙겨주고 동물병원에서 약을 사서 매일 두 번씩 피부에 발라 주는 것뿐이었다. 약을 바르는 것도 거부하던 녀석은 며칠 지나니 나와 마주치면 조용히 머리를 내민다.


최소한의 돌봄에 대한 결정이 서게 된 이유에는 옆집의 컴플레인 결정적이었다. 고양이가 주로 우리 집 앞에서만 머물다 보니, 장기간 여행을 떠났다 돌아온 옆 이웃은, 우리 집 현관에 누워있는 이 녀석을 보곤 내가 키우는 반려동물인가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어느 날 우리 집을 찾아와 정원 위에 다짜고짜 고양이 똥이든 봉지를 내던지며 "너네 고양이 안에서 키우면 안 돼?'라며 나에게 온갖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아니 이전에 우리 집에 동물 자체가 없었는데, 혹시 네가 키우는 고양이니? 가 먼저 아닐까...)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미안한데, 우리 집에서 키우는 반려동물이 아니다. 휴가로 안 계실 때 단지로 들어온 길고양인데, 다른 주민들도 내쫓으려고 했지만 자꾸 돌아오니 나도 어쩔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 집에도 몇 번 똥을 싸놓았다.


잔뜩이나 구구절절한 내 설명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옆집에서는 '모르겠고, 그냥 너희 집 차고에 넣어 키워라'라는 대답만 앵무새처럼 내뱉었다. 내 고양이도 아닌데, 우리 집 앞에 자주 있다 보니 모든 걸 내 책임으로 몰아가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나의 폭탄선언

그 일이 벌어진 그날 아침, 나는 A4용지 한 장을 가득 채우는 글을 써서 모든 집에 배포했다.


간단히 내용을 설명하자면 아래와 같다.

최근 우리 단지에 고양이 한 마리가 머물고 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여러 번이나 쫓아냈지만 계속 돌아와 현재는 저희 집 앞 주변에 머물고 있는 상황이다. 이 고양이는 내가 키우는 내 반려동물이 아니다. 가만히 두다 보니 이웃들에 조금씩 피해를 주고 있는 것 같고, 아이도 굶주림과 질병이 심해지다 보니 가여워, 이 고양이에게 최소한의 돌봄을 제공하고자 한다. 내 차고에 아이가 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고, 단지 위생 문제를(배변 문제) 위해 고양이 화장실도 마련하였다. 혹시 이 방법이 불편하시거나 더 나은 해결책이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달라. (내 번호)



선전포고용 레터


다행히 대부분의 주민들은 이미 내 상황을 이해하고 있었다. 이미 여러 번 내쫓아 봤는데 계속해서 돌아온다고, 주인에게 버려진 것 같다고. 상대적으로 너네 집을 안전하다고 생각하는가 본지 며칠 그 집 앞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챙겨줘도 괜찮다고. (너그러운 이웃들을 만나 다행이다.)


단지 이웃께 의견을 구함과 동시에 나는 우리 집주인에게도 문자를 남겼다. 단지에 고양이가 들어왔는데, 자꾸 집 주변에 실수를 해 우리 집 차고에서 배변을 해결하거나 지낼 수 있도록 해도 괜찮겠냐고. 다행히 집주인도 따뜻한 반응을 보였다. 집주인 역시 말해줘서 고맙다며 차고에서 케어하는 것은 상관치 말고 편하게 지내라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옆집은 그 글을 내 눈앞에서 읽어 놓고도 우리 집 차고에 가둬두면 안 되겠냐고 되묻는다. (하?) 자기네는 이 단지가 너무 좋은 게 다 열고 지내도 안전해서인데, 신경 써야 돼서 불편하다는 거다.


그동안 혹여나 다른 이웃집에 저지래를 해놨다가 해코지를 당할까 싶어, 밤에 고양이가 우리 집 차고로 들어가면 문을 살포시 닫아 두었는데... 그냥 내버려둘걸 그랬나 보다. (충분히 이해는 한다. 해결하는 방법이 틀렸을 뿐이다.)


고양이가 있는 새로운 일상

대다수의 동의가 있었으니(옆집만 빼고 다!), 그날 이후 우리 집 차고 문은 활짝 열렸다. 이제 더 이상 녀석은 쫓겨나지 않았고, 야단 법석이던 옆집도 한층 조용해졌다. 가끔 우리 집 현관에서 햇볕을 쬐고 있는 고양이에게 "쒸쒸쒸!!" 하며 차고로 들어가라고 내뱉는 소리를 종종 듣는 거 빼고는.... (옆집은 크리스천이다. 아마 고양이 자체를 무서워하시는 것 같다...)


그런데 놀랍게도 녀석은 아주 영리하다. 터전을 만들어준 이후로는 우리 집 경계를 넘어 다른 이웃집에 방문을 끊었다. 더불어 규칙적이고 충분한 휴식을 취한 덕분일까, 처음에는 듬성듬성했던 털도 일주일 만에 많이도 자랐다. 이제 녀석은 우리 집 차고와 작은 정원을 사이를 오가며 나름대로 제 영역을 만들고 있다.


도대체 너는 어디서 온 거니? 엄마는 누구야..?

아직 이 녀석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못했다. 언젠간 또 떠날지도 모르는 인연이기에. 그저 다가오면 머리를 만져주고, 눈을 마주치면 말을 걸어줄 뿐이다. 이 고양이는 내게 한 가지를 알려주었다. 인연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인연이 우리를 선택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걸. 나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지만, 이 녀석은 이미 내 삶 속으로 들어와 있다.


이제, 문득 창밖을 볼 때마다 나는 그 작은 노란 그림자를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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