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에서 찾는 나만의 루틴

움직이지 않으면, 삶도 정체된다

by 김찐따


길고 긴 우기가 지나 요즘의 발리는 드디어 본래 모습을 찾은 듯하다. 햇살이 비치는 발리의 아침, 바다를 한참 바라보다 생각했다. 한국에서의 바쁜 일상을 뒤로하고 발리로 정착(이민)을 마음먹고 온 지도 벌써 몇 달. 이번엔 단순한 여행지가 아닌, 새로운 삶을 꾸리려는 이주민으로서 발리의 공기를 잔뜩 들이마시고 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했던 '강박'이 따라온다. '무언가를 이루어야 한다', '시간을 헛되이 보내서는 안 된다'같은 생각들. 아이를 내 맘대로 키우겠다고 마음먹고 왔으면서도, 새로운 일을 찾아야 한다는 압박감은 마음 한구석을 계속 누르고 있었다. 마치 '쉼'을 모르는 사람처럼, 멈춰 있는 순간에도 내 머릿속은 끊임없이 돌아갔다.


'이렇게 까지 하려고 발리에 왔던가?'

문득 스스로에게 다시 물었다. 분명 더 느리게, 더 깊게 살기 위해 이곳을 선택했을 텐데.


그래서 올해는 '적응의 시간'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처음이긴 하지만, 흐름에 내 삶을 맡겨보기로...(삶은 스스로 개척해야 하고 늘 행동해야 한다!라고 생각하던 나였지만..) 하지만 역시나 그렇듯 오랜 나의 도시 습관은 사라지지 않는다. 가끔씩 불안이 내 어깨를 두드릴 때면, 깊게 호흡하면서 스스로를 계속계속 다독이고 있다.


"천천히 가기로 했잖아, 느림에도 가치가 있다는 걸 배우러 온 거잖아."


그런데 움직이지 않으면, 삶도 정체된다.

발리에 온후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을 꼽자면, '움직임'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서울에서는 출퇴근과 육아가 자연스럽게 하루 만보의 걸음을 만들어냈다. 지하철을 오르내리고, 아이와 함께 하원을 하고, 여기저기를 도보로 오가며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그러나 발리는 다르다.


이 섬에서의 이동은 오토바이와 차가 전부다. 보도블록이 깔린 인도도, 횡단보도도 드문 이곳에서는 하루 천보도 채 걷지 못하는 날이 허다하다. 처음에는 덜 피곤해서 좋다고 생각했지만, 점점 몸이 무거워지고 나른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느 날 문득 핸드폰의 만보기 앱을 들여다보고 놀랐다. 겨우 600보. 무기력에 가까워지다 보니 밖에 나가지 않는 날은 채 1000 보도 넘기기 어려웠다.


한동안은 밖에서 글을 쓰면서라도 '일하는 시간'을 만들어 보겠다고 했지만, 문제는 움직임이 없으니 점점 무기력해진다는 점이었다. 날씨가 더운 탓도 있지만, 스스로 뭔가를 하지 않으면 영 루틴이 만들어지지 않는 환경이다.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일상을 다시 정리해야겠다'라는 마음이 먼저 들었다. 그래서 최근 선택한 것은 조깅이다.


움직임을 통한 재발견

발리는 해양 스포츠와 다양한 액티비티가 발달한 곳이다. 서핑, 요가, 테니스, 헬스 등 선택지는 많았다. 하지만 요가는 성격상 맞지 않았고, 서핑은 혹시 모를 사고 위험 때문에 쉽게 도전하지 못했다. (다치면 아이는 누가 돌보지?.. 나이가 먹어갈수록 신기하게 없던 겁만 많아진다.) 그러다 보니 상대적으로 안전하고, 특별한 장비가 필요 없는 조깅을 선택했다.


나는 발리에서 그나마 도보 환경이 좋은 사누르(Sanur) 해변을 따라 주 2~3회, 아이를 아침에 등원시키고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예상보다 쉽지 않았다. 발리의 아침은 생각보다 더웠다. 조금만 뛰어도 온몸이 땀에 젖고, 열기가 올라왔다. 조깅을 하다 보면 운동보다 생존이 먼저였다.


그렇게 힘들게 달린 후, 지친 몸을 이끌고 해변 근처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과 빵을 주문하는 것이 내 의식이 되었다. 탁자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다, 칼로리를 태우러 왔다가 다시 채우고 있는 모순을 웃으며 받아들였다. 이 행위로 인해 찾은 작은 즐거움이라 여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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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있는 무(無)의 시간

발리에서의 시간은 서울에서의 시간과는 전혀 다른 박자로 흐른다. 이곳에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의 가치를 배우고 있다. 삶이 항상 앞으로만 질주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때로는 고요히 멈춰 서서 바라보는 시간이 더 풍요로울 수 있다는 것을.


발리에서 나만의 루틴을 찾아가는 과정은 단순히 몸을 움직이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조금 더 느리게, 조금 더 편안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다. 아직은 한~~~~ 참 적응 중이지만, 이 과정 자체가 나에게는 소중한 여정이 되었다.


본래의 나는 생각이 떠오르면 바로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사람이었다. 뭐든 빨리 해결하고 싶어 하는 급한 마음으로, 생각에 즉시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길 것이라는 강박이 늘 지배적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지금까지 아무것도 안하고 별문제 없이 잘~살고 있다.


문득 깨달았다. 어쩌면 문제란 것이 실제로 존재하기보다는, 내가 문제라고 생각해서 생겨나는 것은 아닐까? 서두르지 않아도, 모든 일을 즉시 처리하지 않아도, 세상은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내 안의 조급함이 문제를 만들어내고, 그 문제가 또 다른 문제를 낳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문제라고 믿었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내 마음속 환상에 불과했다는 진실을.


모든 것이 다른 발리에서, 나는 완전히 다른 호흡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다. 때로는 자문한다. 나는 원래 빠른 사람일까, 아니면 느린 사람일까? 이 질문을 던지며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쌓이고 있다.


이 여정이 끝날 무렵,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을까? 혹은 어쩌면 이 과정을 통해 본래의 나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천천히 드러나는 나의 진짜 모습을 기대하며, 오늘도 발리의 느린 박자에 몸을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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