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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이제 없지만
엄마의 몸속에 할머니가 다시 살고 있는 거 같다
엄마가 나를 낳아
내 몸속에 엄마가 다시 산다면
내 몸속에는 할머니도 있고 엄마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내 눈빛은 나만 보는 것이 아니고
내 목소리는 나의 목소리만은 아닐 것이고
내 팔다리에도 엄마의 엄마의 엄마가...
이렇게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우리 몸속에 살고 있는 수없이 많은 엄마들이
함께 웃고 울고 하는 것 아닐까
외로워도 외로워 게 아니다
혼자이지만 혼자일 수가 없다
무언가 할 수 있을 거 같다
-이근화 시인(1976~),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동아일보 칼럼-
어머니는 오늘도 나에게 sns를 통해 좋은 시를 보내 주셨다. 학창 시절에는 수능공부에 도움이 될까 신문에서 칼럼들을 오려서 주셨다면 이제는 오은영 박사의 아이들 육아 조언, 건강 스트레칭, 좋은 시 등 주제가 다양해졌다. 어떤 때는 아이들 하교를 도와주시러 온 엄마가 오려두고 가신 이런 글들이 퇴근해서 화장대에 올려져 있으면 좀 귀찮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울 엄마 정성이시네' 하고 감사히 읽을 때가 많고 덕분에 좋은 글도 많이 접하게 되는 혜택을 누리고 있다.
위 시를 읽고 나도 한때 내 몸속에 세포들도 무수한 조상들의 유전자들의 결합체인데 내 행동하나하나도 다 그 유전자의 영향을 받겠구나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얼마 전 글쓰기 모임 동료들과 화상모임으로 주기적으로 만나다가 오프라인 만남을 가진 적이 있다. 그전에 최재천 교수님의 '과학자의 서재'를 읽고 인상 깊은 부분을 그날 이야기 나누자고 했다. 한 분이 책에서 나온 '이기적인 유전자'를 읽어보셨는데 인간의 행동이나 선택 하나하나도 내 의지인 거 같으나 사실은 대부분 유전자의 조종을 받는 것이라는 게 책의 주요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인간과 동물이 다른 것은 바로 자유 의지로 이것으로 운명을 바꿀 수 있다라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동물은 출산을 통해 계속 대를 이어 나가지만 인간은 원치 않으면 출산을 안 하는 경우 같은 것이라고 한다. 그나마 희망적인 마무리였다.
나도 위의 시처럼 내 행동이나 취향에서 어머니나 아버지 또는 그 윗 조상들의 영향을 받는다고 느낀 적이 가끔 있어 에피소드를 적어 보려고 한다.
우리 시댁은 충청도인데 어머니와 시누이들의 식성 모두 단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추석에 떡을 해도 설탕 안 넣은 콩이나 동부를 넣은 것을 좋아하고 절편도 짭짤한 김에 싸 먹는다. 어머니는 달콤한 깨송편을 좋아하는 며느리를 위해 방앗간에서 깨송편을 추가로 주문하시곤 해 주셨다. 우리 둘째 시누이 남편은 전라도 분인데 이하 편하게 고모부라고 부르겠다. 그 고모부도 이 깨송편을 좋아해서 추석 다음날 놀러 온 시누이들과 둘러앉아 음식을 먹으면 나와 고모부 둘만 깨송편을 먹으며 "혹시 전주 이 씨세요? 고모부가 물으면 나는 받아서 '네 저 전주 이 씬데요." 하면서 서로 깔깔거리며 농담을 주고받는다. 어쩌다 보니 성과 본까지 같은데 식성이 같아서 이것으로 농담 주고받기를 하는 것이다. 이럴 때는 외국 나와서 만난 한국인처럼 반갑다. 그래서 우리 고모부 오시는 날에는 단 것을 좋아하는 고모부의 또다른 최애 떡인 찹쌀떡도 사 간다.
최근에 시누이의 썰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전라도 쪽에서는 콩국수에 설탕을 넣어 드신다고 한다. 시누이가 시댁 가서 놀란 것은 콩국수 먹는데 아예 하얀 설탕 봉지를 상에 올려놓고 먹더라는 것이다. 우연의 일치인가 내가 전주 이 씨라 식성도 그런가 싶기도 하다. 사실 우리 친정 식구들도 떡고물은 자고로 단맛이 있어야 한다는 주의이다. 그래서 친정어머니는 동지에 팥죽과 단팥죽 두 가지를 맛보도록 해 주셨다.
또 다른 에피소드는 우리 어머니는 절약 정신이 뛰어난 분이신데도 불교 신자로 발우공양의 의미를 아는 분이라 음식을 허투루 버리는 것을 죄악 시 하시는 분이다. 손자들에게 음식을 남기지 않도록 교육도 하시지만 그래도 남기는 것은 자신이 드시고 한정식 집 가서도 남은 음식이 아깝다며 반찬을 되도록 비우고 오시려고 노력하신다. 그러면 우리 딸들은 "엄마, 좀 억지로 드시지 마. 소화 안 돼." 하고 아버지도 제발 그러지 말라고 해도 자신의 신조가 있으시므로 이제는 그려려니 한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자매들은 음식을 남기지 않으려는 습관이 몸에 좀 배어 있다. 제일 무서운 건 둘째 딸인 내 동생이다. 같이 식당에 가면 " 음식은 더 시켜 줄 수 있지만 남기지는 마라." 라며 손이 큰 나를 매의 눈으로 감시한다.
그런 내가 요즘 엄마를 닮아 아이가 반찬을 남기면 남편은 버리라고 하는데 못 버리고 싱크대에 서서 접시를 비우는 습관이 생겼다. 물론 김치나 장아찌류는 되도록 피하고 나물 반찬이나 멸치조림 같은 밥 없이 먹을 수 있는 것들이다. 가끔 엄마가 보고 "아이고 짜다 일부러 먹지 마라" 하시며 말리시지만 속으로 '누구한테 배웠겠나?'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참 귀여운 아이러니이다.
나는 오늘 주말 아이들이 둘 다 놀러 나가고 남편도 벌초를 위해 시댁에 가서 홀로 집에 있지만 전혀 외롭지 않다. 당연히 자유의 몸이니까라기보다는 흠흠...
어머니가 보내 준 시처럼 내 몸속에는 어머니도 할머니도, 그 할머니의 어머니도 계시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 뭔가 함부로 살 수 없는 느낌이다. 내 몸이 나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 시의 마지막처럼 그러니 뭔가 나에게도 여러 가지 숨겨진 능력이 있을 거 같고 그것으로 무언가 해 낼 수 있을 같다. 왠지 저 마음 밑바닥에서 온천수처럼 나를 존중하는 마음들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거 같다.
유미의 세포들이라는 드라마처럼 내 세포들이 오늘도 와글와글 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거 같다.
저녁은 뭘 먹을까?라는 고민에 저기 게으른 유전자가 '벌초 간 남편은 먹고 올 테니 친정엄마에게 빌붙을까? 배달 음식 시킬까?' 하고 저 쪽에 합리적인 유전자는 '배달음식은 다 먹으면 내가 설거지해야 되잖아 그리고 일회용품도 많이 나오고. 그러면 오늘은 한번도 안 갔으니 운동도 할겸 외식하고 공원에서 한바퀴 돌고 올까? '라고 말한다. 나의 주말 저녁은 이렇게 나의 합리적인 사고에 의한 의지로 외식을 선택하게 되었다.(라고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