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마지막 행복이다>
인간의 감정과 욕망은 멈춤이 없다.
만족이란 없다. 감정은 외부 요인에 따라 쉽게 흔들리고, 욕망은 끊임없이 솟구친다.
우리는 말한다.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하지만 대부분은 죽는 날까지도 행복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죽을힘을 다해 얻은 일시적인 즐거움을 행복이라 착각하며 살아갈 뿐이다.
그러나 그 즐거움은 금세 스쳐 지나간다.
나의 것이 되지 못한 채, 슬픔과 고통으로 바뀌어버린다.
이 모든 변화가 마치 인생의 법칙처럼 느껴진다.
행복의 기원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덧없는 유혹에 이끌려 망상과 욕망으로 뒤엉킨 채,
혼란스러운 감정 속에서 방향을 잃는다.
이것이 정말 삶의 본질일까.
아마도 그렇다고 생각하는 내가, 문득 의심스러워진다.
나는 과연 누구였는가.
상상할 수는 없지만, 만약 죽어 있는 상태라면 더 이상 행복을 고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쩌면,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끊임없이 행복을 추구한다.
그리고 그 행복의 실체는, 마치 끝이 없는 공간처럼 늘 멀리 있다.
행복을 얻기보다는, 그 환상이 깨지는 괴로움 속에서 좌절하고 우울해하며 살아간다.
행복이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정작 우리는 그 영향력에 대해 별다른 고민 없이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1년, 2년… 그렇게 평생을 살아간다.
그러면서 말한다.
"나는 불행하다"고.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잘못된 판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 그것은 나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삶을 제대로 살아보겠다는 의지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겠다는 다짐이다.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말은 어쩌면,
무지에 근거한 수사적 표현이었고,
과장된 착각이었으며,
의미 없는 미사여구였는지도 모른다.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사람들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가다가
묘지라는 전차로 갈아타서 여섯 블록이 지난 다음,
극락이라는 곳에서 내린다고 하더군요.”
<욕망에서 묘지를 지나 극락으로> —
그 대사는 사람들이 죽기 전까지 욕망 속에서 살아간다는 의미다.
욕망에는 충족이 없다.
자극받은 욕망은 더 큰 자극을 원하고,
충족된 욕망은 곧 희미해진다.
지속성이 없다.
새로운 욕망이 솟아오르고, 우리는 또다시 그것을 채우려 애쓴다.
그러다 결국 죽는 날까지 채워지지 않는 결핍 속에서
행복을 좇다가, 불행 속에서 생을 마감한다.
기쁨이 슬픔으로 변하는 순간,
모든 것이 헛되었음을 깨닫는다.
그러한 경험이 반복되면 나의 정신은 동요하고,
삶은 점점 공허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내가 살아온 인생은 선(善)도 아니고, 악(惡)도 아니다.
그저, 잘 준비된 불행의 길을 묵묵히 걸어왔을 뿐이다.
그 사실을 깨달을 때, 눈물이 솟는다.
나는 내 인생의 교활한 대변자였고,
스스로를 포장하며 오만하게 살아왔다.
그리고 지금,
나는 나 자신을 조롱하는 나를 마주하고 있다.
경국현,
부동산학 박사. 백혈병을 계기로 인생의 방향을 바꾸다.
『죽을 뻔하고, 철학에 빠졌다』 화, 수, 목, 연재 중.
쇼펜하우어와 니체, 그리고 신과의 긴 대화를 이어간다.
“죽음을 마주하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삶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