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다는 건, 단지 아직 죽지 않았다는 뜻이다>
사람은 일생을 돈(富), 명예(名), 그리고 쾌락(樂)을 좇으며 산다. 나는 아직 그 셋이 아닌 것을 추구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감정과 욕망은 결국 이 세 가지를 손에 넣기 위해 움직인다.
나 또한 그렇게 살아왔다. 손에 쥐었나 싶은 순간, 나의 달리기는 멈췄다. 백혈병이었다. 개뿔. 욕이 튀어나왔다.
인간은 언제나 자기중심적이다. 자신의 즐거움을 먼저 생각하고, 타인의 즐거움은 언제나 차선이다. 나의 고통이 타인의 즐거움이 될 수 있고, 타인의 고통이 나의 즐거움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나의 고통이 타인의 고통이 되기는 어렵고, 타인의 즐거움이 곧 나의 즐거움이 되는 일은 드물다.
삶의 방식은 제각각이지만, 이런 이기성은 인간이 가진 고질적인 감정이다.
엘라 휠러 윌콕스의 시 <고독>은 이렇게 시작된다.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으리라.
울어라, 너 혼자 울게 되리라.”
고개가 끄덕여진다.
인생(人生)은 일생(一生)이다.
우리는 인생을 즐겨야 한다. 여기서 ‘즐긴다’는 말은, 내가 중심이 되어 세계가 움직인다는 뜻이다.
지구가 태양을 도는 것이 아니라,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처럼 —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들리지만, 내 세계의 중심은 바로 나다. 세상은 나의 것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나에게는 진리다.
내일 죽는다면 오늘 밤을 넘길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내일의 쾌락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가 지금 이곳에 존재한다는 그 하나, 그 직접적인 사실이 중요하다.
살아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세상은 나의 것이 된다.
내가 살아온 시간은 내 얼굴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80억 인구 중 내 얼굴과 같은 사람은 없다.
80억 분의 1.
이 얼마나 경이로운가.
너와 내가 같다면, 나는 너고, 너고, 또 너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나’가 아니다.
나의 감정은 너와 다르고, 또 다른 너와도 다르다.
이러한 감정의 개성은 정성적으로도, 정량적으로도 다르다.
나의 불행은 너의 불행이 아니고, 너의 불행은 나의 불행이 아니다.
행복도 마찬가지다.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너와 다르고, 그로 인해 우리 삶의 궤적이 하늘과 땅처럼 달라지더라도, 나는 변하지 않는 나로 남는다. 단 한 번 주어진 나의 인생을 살 것이다.
사람은 돈이나 명예로 서로를 비교한다. 질투도 생긴다.
그렇다면 자아로 살아가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도 질투는 존재할 수 있다.
어느 쪽이 더 나은 삶인가. 그것은 마음의 선택이다.
나는 자아라는 마음을 가지고 산다. 너는 그렇지 않다면, 네가 돈이 많아도, 명예가 높아도, 진정한 삶의 기쁨을 누리지 못할 수도 있다.
시간은 연속적이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있었고, 내가 죽은 후에도 있을 것이다.
백 년 전, 천 년 전, 만 년 전, 그리고 억 년 전에도 시간은 흘렀다.
죽은 뒤의 시간 또한 내가 가늠할 수 없는 크기로 이어질 것이다.
나는 다만 지금, 살아 있을 뿐이다.
내가 분명히 아는 것은, 내가 태어났고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이다.
기원은 알 수 없다.
그래서 인생이 단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일 수도 있다는 상상이 가능하다.
일생(一生)이 아니라 다생(多生).
그것이 불교의 윤회요, 기독교의 영생이며, 니체의 영원회귀다.
니체는 그것을 ‘가장 무거운 짐’이라 불렀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역설로 읽는다.
영원회귀란 두 번 없음, 단 한 번뿐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지금 이 인생이 더욱 중요하다.
나의 시작은 남자와 여자의 섹스에서 비롯되었다.
그 이전에 나는 없었다.
죽음도 같다.
어머니의 자궁을 뚫고 나온 순간부터 나의 운명이 시작되었고, 죽는 순간 나의 시간은 멈춘다.
너는 80년을 살다가 가고,
너는 65년을,
너는 94년을,
너는 17년을,
너는 6년을 살다가 간다.
나는 몇 년을 살지 모른다. 하지만 오늘, 나는 살아 있다.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아직 죽지 않았다는 뜻이다.
생명의 시간이다.
삶의 원천은 ‘의지’라고들 한다.
그러나 건강한 사람이 먼저 죽고, 술·담배에 찌든 사람이 오래 살기도 한다.
TV를 보다가, 출근하다가, 수영하다가, 간판에 맞아, 교통사고로, 목욕탕에서, 음식이 목에 걸려, 길 가다 미끄러져서 죽기도 한다.
지금 살아 있다는 것 — 그것은 설명할 수 없는, 불가능한 우연의 결과다.
죽음의 시간은 불투명하다.
그래서 공허하다.
불교는 말한다.
“사람의 목숨은 한 호흡 사이에 있다.”
죽음은 의지와 무관하다.
그러니 살아 있는 이 시간은 나의 향유여야 한다.
오늘 살아 있기 때문에 나는 웃을 수 있다.
오늘 살아 있기 때문에 나는 울 수도 있다.
인생의 본질은 ‘살아 있다’는 것이다.
어떤 말로도 이보다 깊은 말은 없다.
나를 웃게 하고, 울게 하는 것은 내 안의 감정이다.
감정은 절대적으로 주관적이다.
하얀 구름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보고 드는 감정도 너와 내가 다르다.
분노, 사랑, 절망, 쾌락, 공포, 죽음, 환희, 성공…
그 감정들이 우리에게 닿을 때, 그 깊이는 모두 다르다.
감정은 살아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내가 울 때 너는 웃고, 네가 울 때 나는 웃을 수 있다.
그러나,
살아 있지 않다면 —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고,
아무것도 바랄 수 없고,
아무것도 사랑할 수 없다.
경국현,
부동산학 박사. 백혈병을 계기로 인생의 방향을 바꾸다.
『죽을 뻔하고, 철학에 빠졌다』 화, 수, 목, 연재 중.
쇼펜하우어와 니체, 그리고 신과의 긴 대화를 이어간다.
“죽음을 마주하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삶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