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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에너지를 빨아먹는 뱀파이어

열 번째 남자(3) 말보로 레드, 25세

by 무아예요

그는 집에 있을 때 스탠드 조명 하나 켜고, 책을 읽거나 노트북만 했다.


그의 꿈은 소설가였다. 모든 소설을 섭렵했을 만큼 읽는 것도 좋아했지만, 노트북으로 소설을 직접 쓰기도 했다.


한 번은 그의 노트북을 빌려 과제를 하다가 내 이름이 몇 번이나 적혀 있는 한글 파일을 발견했다.


한두 개가 아니었다. 내 이름을 가진 그 여자 주인공들은 미국에도 있었고, 조선 시대에도 있었고, 중세 시대에도 있었다. 그리고 그녀들은 각각 다른 이름을 가진 남자들과 사랑을 나눴다.


소름이 돋았다. 내가 도대체 이 파일들이 뭐냐며 화를 내자 그는 또 당당하게 말했다.


“다른 여자 이름 쓰는 것보다 낫잖아. 로맨틱한 거 아니야?”


맞다. 그의 말이 맞다. 그 속에서 다른 여자의 이름이 나오면 더 이상했을 수 있다.


그는 노트북으로 한 번씩 디시인사이드 주식갤러리에 들어갔다. 보통 커뮤니티 하는 건 숨길 법도 한데 그는 역시나 당당했다. ‘주갤러 형님’들이 얼마나 재밌는 줄 아냐며 게시글을 보여주기도 했다. (좀 웃기긴 했다.)


그가 노트북으로 하는 일이 또 있었다.


유튜브로 아이돌 무대 영상을 찾아보는 것이었다.


그것도 꼭 걸그룹만. 에이핑크처럼 유명한 걸그룹도 아니고, 처음 들어보는 음악까지 모두 섭렵했다. <롤리타> 사건 이후라 그런지 괜히 그가 변태 같았다. 하지만 그는 역시나 당당했다.


“아이돌은 무대에서 완벽하고 밝은 모습만 보여주잖아. 저런 거 보면 나도 반짝반짝해지는 것 같아.”


전에도 그가 이런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사귀기로 한 지 며칠 되지 않았을 때, 그는 자신의 과거가 쓰레기 같았다고 털어놓았다. 나는 쓰레기 같아 봐야 얼마나 쓰레기겠냐고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하지만 그다음 덧붙인 말이 마음속에 찝찝하게 남아있었다.


“나 이제부터 쓰레기처럼 안 살 거야. 그래서 너 만나는 거야.”


조명 하나 켜둔 어두운 방 안, 아이돌 영상을 찾아보던 그의 모습.

그때 나는 문득 서늘함을 느꼈다.


그는 뱀파이어였다.

남의 에너지를 쪽쪽 빨아먹는 뱀파이어.


영상 속 아이돌처럼 나 또한,

나의 밝은 기운이 그에게 잡아먹히고 있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어려서였을까. 사랑이었을까.


나는 그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느끼면서도 선뜻 헤어지질 못했다.


가끔 나 없이 혼자 있는 그를 볼 때면 마음이 짠해져서 그를 떠날 수 없었다. 어쩌면 그가 변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특별히 헤어질 만한 이유도 없었다.


헤어지기보다 오히려 그를 더 이해하고 싶었다. 도대체 왜 좋아하는지 이해할 수 없던 것들을 직접 해보기 시작했다. 그가 좋아하던 홍상수 영화를 보고, 만화 책방에 가고, 롤리타를 읽었다. 담배는... 어딘가 죄 짓는 기분이 들어 차마 피우지 못했다.


아무튼 우린 그렇게 함께 하는 시간이 점점 더 많아졌다.


나는 언젠가부터 학과도 동아리 모임에도 가지 않고, 친구들이 술 먹자고 전화해도 받지 않았다. 사람들을 강박처럼 만나다가 한두 번씩 안 만나보니 묘한 해방감이 들었다. 그가 왜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 혼자 있는 시간을 더 좋아했는지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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