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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늘 책을 읽었다

열 번째 남자(2) 말보로 레드, 25세

by 무아예요 Mar 02. 2025

그가 또 한 번 담배를 피우러 나갈 때, 나는 담배를 피우지도 않으면서 같이 따라 나갔다. 


뭐 그가 딱히 마음에 들어서는 아니다. 난 원래 어릴 때부터 말이 없는 사람을 보면 괜히 먼저 다가가곤 했다. 그런데 그가 혼자 뒤돌아 담배를 피우는 뒷모습을 보자니 선뜻 말을 걸기가 쉽지 않았다. 


그가 피우던 담배는 말보로 레드. 인터넷 소설에서나 보던 말보로 레드를 실제로 피우는 사람이 있다는 게 놀라웠다. 허세 같다고 놀리려다 보니 그는 담배를 너무 진지하게 피우고 있었다. 


중고딩 때 친구들이 허세 부리듯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랑은 달랐다. 쓰디쓴 인생을 견디기 위해 담배를 피우는 ‘어른’ 같았다. 


그래봤자 스물다섯에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싶지만, 

지금까지도 그에게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어쩌면 사연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 형 언제 갔대? 맨날 저렇게 말없이 사라져.”


그는 같이 술 마시던 사람들과 인사도 하지 않고 조용히 사라졌다. 


그냥 정말 혼자 술 마시러 왔던 건가. 

하여튼 난 저런 사람 처음 봤다. 


그를 처음 만난 다음 날, 그와 같은 학과인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그가 내 연락처를 물어봤다고 했다. 왜지? 의외였다. 우리가 딱히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고, 내가 인상에 남을 만한 일도 없었는데 말이다. 


우리는 카톡을 몇 번 주고받다가 따로 만났다. 학교 앞이 아닌 우리 동네에서 술을 마시다 어쩌다 보니 사귀게 되었다. 


날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는 내게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키도 크고, 어깨도 넓고, 잘생겼고, 궁금하기도 했고... 나도 그를 잘 알지는 못했지만, CC 한 번 해보는 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별다른 이유 없이 우리의 연애가 시작되었다. 


사귀고 나서도 그는 말보로 레드를 피워대는 건 똑같았다. 종종 참이슬 빨간 뚜껑을 마셨고, 그렇지 않은 날에는 늘 생맥주를 마셨다. 생맥주를 주문할 때는 거품은 빼달라고 말했다. 


담배와 술 말고도 그의 취향은 확고했다. 그는 홍상수 영화를 좋아했으며 홍대 상상마당에서 독립 영화를 보곤 했다. 그는 연어를 좋아했고, 캡 모자 쓰는 걸 좋아했고, 만화책방을 좋아했다. 만화책 말고도 책이라면 다 좋아했다. 


그는 늘 책을 읽었다. 


가방도 없이 한 손에 책을 들고 다니며 틈만 나면 책을 읽었다. 데이트 하기 전 나를 기다리면서도, 내가 잠깐 화장실에 간 사이에도, 집에 있을 때도 책을 읽었다. 책을 무슨 그렇게까지 읽나 싶어서 한 번은 내가 ‘허세’라고 장난삼아 이야기 한 적 있다. 


“책 읽는 게 왜 허세야? 네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말문이 막혔다. 그러게, 난 왜 책 읽는 걸 허세라고 생각했을까? 그의 말을 듣고 나면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그는 처음 만난 날부터 항상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가 비정상 같고, 이상한 사람 같았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듣고 나면 납득은 갔다. 그렇다고 그가 완전히 이해되었던 건 아니다. 그의 말과 행동을 납득하지 않기에는 딱히 이유가 없었을 뿐이다. 


그는 <적과 흑>, <인간실격> 같은 민음사에서 출판한 고전문학을 주로 읽었다. 나도 책을 좀 읽어볼까 싶어 그의 집에 널브러져 있는 책들을 구경했다. 민음사에서 출판한 책이 아닌, 두껍고 검은 양장 책을 발견했다. 


그 책의 이름은 <롤리타>. 읽어보지도 않았는데 익숙한 제목이다. 한참 모 가수의 소아성애 논란으로 떠들썩하던 때, 같이 언급되던 작품이었다. 그 당시에는 소아성애 논란이 있는 가수의 노래를 듣는 것조차 금기시될 정도로 심각한 문제로 여겼다. 나는 곧바로 그에게 <롤리타>가 뭔 줄 알고 읽냐며 따졌다. 역시나 그는 그만의 논리로 내 말문을 막히게 했다. 


“내가 소아성애라서 <롤리타>를 읽는 게 아니잖아. 문학적으로 얼마나 배울 게 많은 책인데, 다 읽어 보고나 말해.”


그는 곧바로 책을 펴서 그 유명하다는 <롤리타>의 첫 문장을 보여주었다. 도대체 이게 왜 그렇게까지 유명하다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이해하고 넘어갔다. 그는 문학책이라면 안 읽어본 게 없고, <롤리타>는 수많은 책 중 하나겠거니...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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