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째 남자(3) 트로트 가수, 32세
::선우정아 - 도망가자::
집에 가려던 차에 그가 뒤풀이 자리로 초대했다.
그와 처음 제대로 함께 술을 마시는 자리였다. 전에 회식을 몇 번 했는데 그는 항상 다음 스케줄을 하러 인사만 하고 바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뒤풀이 자리에는 공연 관계자가 대부분이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뭐, 일하다 보면 모르는 사람들과 술 마시는 일은 종종 있어서 어색하진 않았다.
무슨 무슨 엔터테인먼트 차장님, 실장님... 가수, 유튜버... 무슨 무슨 공연 기획사 대표님, 무슨 무슨 회사 대표님 혹은 홍보팀 팀장님...
이름보다 직책으로 불리는 그런 자리. 이름도 얼굴도 모르지만 직책은 익숙한 사람들. 그중 나는 ‘작가’로 불리면서 작가 같은 말투와 행동을 하며 자리에 적응해갔다.
다들 언제 어떻게 만날지 모르는 사이니까 우선 친해지고 봐야지. 그런 생각으로 대화를 나누고 시간이 지나다 보면 다들 유쾌하고 좋은 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대충 술 한두 잔 마시고 일어서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나도 어느새 취해갔다.
그를 힐끗 쳐다보니, 술을 찔끔찔끔 마실 뿐 경직된 자세로 앉아서 주변 사람들에게 술만 따랐다.
예상대로라 놀랍지도 않았다. 그는 여기저기 목소리가 들리는 곳마다 혹시나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귀를 움직였다. 즐기는 척해도 본능적으로 주변의 모든 것을 의식하고 있는 것 같았다. 꼭 모든 감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동물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가 한 번씩 장난스러운 멘트를 던질 때마다 다들 깔깔 웃어댔다.
‘아무 말 대잔치 쩌네. 쟨 진짜 단순해.’, ‘나도 좀 그렇게 속 편하게 살고 싶다.’라고 말하면 그는 또 그 말이 자랑스럽다는 듯이 웃기만 했다.
2차, 3차를 가도 그는 취하지 않고 말짱했다. 나는 조금 취했지만 버틸 수 있을 정도라 끝까지 남아서
4차까지 갔다.
거의 다 만취한 상태로 집에 가고 4차는 네다섯 명만 남았다.
남은 사람들은 전부 그와 오랜 친구들이었다. 그는 사람들을 배웅 하느라 자리를 비웠다. 한참을 기다리다가 내가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오지랖이 넓어요?’라고 말하자 다들 ‘원래 저래요. 지금도 일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세요.’라며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그에게는 퇴근이 없다. 다들 언제 어떻게 일로 엮일지 모르는 사람들이니까. 그에게는 모든 사람이 직장 상사인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로 그에게는 ‘잘 보여두면 좋을 사람’ 중에 하나겠지.
그는 자리에 다시 돌아와서도 몇 번이나 조심히 들어가라는 전화를 걸었다.
그래, 저 사람 인생이니까 신경 쓰지 말자. 오지랖은 내가 부리고 있네... 나도 이제는 그만 그를 쳐다도 보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툭.
드디어 그가 모든 전화를 마치곤 휴대폰을 테이블에 던지듯이 두었다. 그리곤 앞에 놓인 잔에 소주와 맥주를 들이부었다. ‘짠~’을 외치더니 한 입만 먹을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벌컥벌컥 입에 털어 넣었다.
“이제 좀 살겠네.”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안쓰럽고, 걱정되고, 대견하고 그런 마음에 그를 너무 빤히 쳐다봤나 보다. 내 눈빛이 느껴졌는지 나를 보며 또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나 괜찮아.”
내가 괜찮냐고 먼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그에게는 마음의 소리까지 들리나 보다.
내 눈치까지 살필 필요 없는데,
나한테까지 그렇게 잘해줄 필요 없는데,
그렇게 하지 않아도 난 그를 좋아할 텐데...
속상한 마음에 갑자기 눈물이 났다.
그가 당황하며 휴지를 건네줬다. 울지 못하는 그를 대신해서 울고 있는 건지. 내가 오지랖인 건지.
그는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오히려 위로를 해주었다. 함께 술을 마시고 있던 사람들이 다들 놀라며 왜 그러냐고 물어봤다.
그가 ‘몰라. 취했나 봐. 내가 울린 거 아니야!’라고 말하면서 분위기를 풀었다. 그리곤 귓속말로 속삭였다.
“오늘 좀 힘들긴 힘들더라. 티 많이 났어?”
나는 그 말을 듣고 더 엉엉 울었다. 내가 그때 정말 취하긴 했던 것 같다. 그에게 연예인 하지 말라고 주정을 부렸다.
‘남 눈치 보는 거 하지 마. 웃지 좀 마. 노래도 못 부르고 유명한 노래도 없고 그냥 연예인 하지 마. 너도 음악을 대단하게 사랑하는 것도 아니잖아.’ 이런 말을 늘어놓았다.
내가 웃지 좀 말라고 한 말에 그는 또 웃었다.
“나도 알아. 그냥 쇼 하는 거야. 근데 돈 벌어야지.”
사랑과 우정과 애정을 구분하지 못해서 가족에게도 하면 안 될 말을 했는데도, 그는 웃어넘겼다.
뒤늦게 실수했다는 걸 알아채고 그에게 바로 사과했다. 우리는 눈을 마주치곤 동시에 같이 웃었다.
솔직히 그날부로 연락 끊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우린 친구로 잘 지낸다. 전보다는 조금 더 편한 친구.
이제는 그가 웃어도 싫지 않다.
이제는 그가 연예인 같지 않다. 이제는 그가 사람 같다. 그는 천상 연예인이라서 연예인을 하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연예인이 아니라서 연예인을 연기하고 살았던 것 같다.
나는 그 가짜 같음이 싫었던 것이고, 가짜라는 걸 안 순간부터는 나에게 진짜로 대해줬다. 그가 원래 내게 진짜로 대했더라도 이전과 다르게 느껴졌다.
그는 나에게 사람으로 봐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나도 그가 사람으로 대해줘서 고맙다.
그런데...
드림캐처는 도대체 왜 준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