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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경 Sep 06. 2024

병실 속 회상과 과거의 아픔 : 현재의 나


강동에 있는 한 병원에서 MRI 검사를 받은 후, 의사는 내게 예상치 못한 소견서를 써주었다.      


“골수암일 가능성이 있으니 큰 병원에 가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소견서를 들고 본 병원인 강동 K 한방병원에 입원했다. 이 병원의 장점은 2차 병원이기에 소견서 없이도 바로 올 수 있다. 게다가 한방병원에 입원하면 양방의 협진을 받을 수 있으니, 몸이 약한 내가 은평구에서 강동구까지 통원할 필요가 없는 최적의 선택이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병원 생활은 결코 쉽지 않았다. 체력은 바닥나고, 음식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2차 병원은 3차 병원처럼 음식이 좋지 않아 올 때마다 밑반찬이나 과일 등을 준비해 와야 했다.      


하지만 강동에 있는 병원에서 본병원으로 바로 온 나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다. 과일로 ‘뭘 먹을까?’라며 한참 쿠팡을 둘러보다 풀무원 딸기 생과일주스가 눈에 들어왔다.     


현재 쿠팡이 ‘와우 회원비’를 갑자기 올려 다시 가입하고 싶지 않았다. 자주 주문 하는 것도 아닌데 8,000원 가까운 돈을 내기엔 아까웠다.      


결국 ‘와우’을 이용하는 남편에게 주문을 부탁했다. 남편은 흔쾌히 딸기주스와 오렌지를 보내주었다. 그 순간 작은 감사함이 가슴을 채웠지만, 동시에 과거의 나쁜 기억들이 떠올랐다.     




아이들이 어리고 내가 학원을 운영 할 시절, 갑자기 병에 걸렸다. 처음에는 단순한 장염으로 생각하고 며칠 입원하면 될 줄 알았던 병이 몇 달을 괴롭혔다. 간신히 퇴원해서도 몸은 온전치 않았고, 학원 일과 아이들을 돌보기가 쉽지 않았다.     


너무 힘들 때마다 동네 작은 종합병원에 잠깐씩 입원하곤 했다. 학원과 아이들이 걱정돼, 지금처럼 장기로 입원하진 못했다.      




한번은 길에서 정신을 못 차리고 초 죽음 되어 병원으로 갔다. 나를 본 의사 선생님은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시신처럼 곧 스러지려는 나를 어찌하지 못하고 입원시켰다. 링거를 맞으며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XX 병원에 입원했어. 갑자기 와서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게 없네. 시간 날 때 수건과 세면도구 좀 가져다줘요?”라고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전화기 속의 남편 목소리는 흥분되어 내 예상과 너무 다른 반응을 보였다.      


“너 지금 어디야? 너 대체 누구를 만나고 다니는 거야?”라며 소리치고 있었다. 집과 학원밖에 모르는 나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나는      


“병원이라니까? 왜 그래? 나 지금 죽을 거 같아. 아이들 아줌마에게 부탁했어.”라며 아이들 걱정을 하자, 남편은 점점 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댔다.     


“학원에 이상한 남자가 너 찾는 전화가 왔어.”라는 남편의 말에 기가 막혀서     


“그게 누군데?”     


“내가 어떻게 알아? 네가 알겠지?”라며 더 크게 소리쳤다.     


“지금 나 죽을 거 같다고?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나에게 그런 남자가 있을 리 없잖아?”     


“그런데 왜 김인경 씨를 바꿔 달라는 거야?”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럼, 전화번호를 불러봐? 발신 번호 찍혔을 거 아니야? 왜 이렇게 사람을 못살게 굴어. 나 지금 병원이라고.”라며 결국 입원에 있는 나는 남편에게 한바탕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3인실이라 옆에 두 아주머니가 계셨다. 두 분은 “무슨 일이야?”라며 “남편이 아프다는데 왜 그렇게 소리치지?”라는 그들의 목소리와 눈빛은 위로와 동정, 연민이 섞여 있었다.      


저녁 늦게 짐을 가지고 온 남편에게 전화번호를 달라고 했다. 남편은 아무 말이 없었다. 힘이 든 나는 더 이상 싸우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 걱정에 일하는 아주머니 댁에 가서 아이들 데리고 와야 한다고만 했던 기억이 난다.     




그날 이후로 병원에서 남편에게 무언가를 부탁할 때마다 그 기억이 떠올라 나를 괴롭힐 때가 많았다.     


또 다른 기억이 스친다. 남편의 권유로 우리는 배드민턴을 함께 배웠다. 처음엔 단순한 취미였고, 함께 운동하며 건강도 지키고 스트레스도 풀자는 좋은 취지였다.      


하지만 배드민턴에 빠진 남편은 오후 수업이 될 때까지 매일 다른 아줌마들과 운동하고 함께 점심까지 먹으며 다녔다. 그런 남편의 행동을 보며 혼란스러웠지만, 내가 선택한 남편이기에 믿었다.     


그러다 우리 구장의 문제로 문을 닫자,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거기서 나에게 호의를 보이는 나이 드신 남자분이 있으셨다. 그분은 아버지처럼 나를 챙겨주셨고, 나는 그분에게 감사했다.      


남편도 운동도 가르쳐주고 같이 게임도 해준다며 고마운 분이라고 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남편은 그 관계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몹시 아프고 퇴원한 나에게 힘이 없다며 그분이 고기를 사주셨다. 남편은 우리가 함께 식당에 들어가는 걸 보았다며 의심하기 시작했다. 솔직하게 말했으면 좋았을 텐데 나중에 그 일로 큰소리가 났었다.      


남편이 매일 오후 늦게까지 놀고 식사하는 아줌마들은 운동을 위해서 만나는 거고, 나에게 운동 가르쳐 주는 아저씨는 이상한 관계로 본 거다. 그분에게 잘 배우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이런 경우가 “내가 하면 운동이고 남이 하면 불륜인가?” 나는 매번 혼란스러웠다. 항상 남편 자신은 문제가 없고, 나에게는 의심이 가득한 그 이중적 시선이 답답했다.     


운동을 처음 하자고 권유한 사람도 남편이었다. 우리가 다니던 구장이 문을 닫자, 새로운 구장으로 데리고 간 것도 남편이었다. 새로운 곳에서 같이 운동하자고 하자 싫다고 한 것도 남편이었다.  

   



결혼 초에도 비슷한 일이 몇 번 있었다. 처음 신혼집은 중계동에서 시작했다. 남편과 걸어가는데 대학 때 알았던 남동생이 전화가 왔다. 남편은 행동으로 기분 나쁜 걸 표현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때부터 그 동생과 연락을 자제했다.     




또 한번은 신혼 초, 대학 후배가 보험 가입을 부탁했다. 우리 동네로 온 후배가 차를 마시자고 했다. 나는 쓸데없이 돈 쓰지 말라며 우리 집으로 데리고 왔다. 차 한잔을 대접하고 종신보험을 들어주었다. 그 보험이 암과 투병 중인 지금 우리 가정에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는지 모른다.     


거의 계약이 끝 날쯤 남편이 왔다. 나는 자랑스러운 남편을 후배에게 소개했다. 남편의 표정이 별로였다. 나는 후배를 배웅해 주고 오겠다며 같이 나갔다. 후배가 엘리베이터를 타는 걸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남편은 아무 말 없이 인상만 쓰고 있었다. 싱크대에는 후배가 마신 찻잔이 깨져 있었다. 깜짝 놀랐다. 나는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몰랐다. 왜 그런지 물어도 대답하지 않는 남편이 이상했다. 그저 남편의 표정과 행동을 보고 마음이 무거워졌었다.     




늦게 공부한 나는 대학원 논문을 남겨두고 남편과 결혼했었다. 신혼 초 남편과 즐겁게 놀고 있을 때, 교수님 전화가 왔다. 논문 때문에 학교로 오라는 연락이었다. 나는 준비하고 가겠다고 했다. 그때도 남편은 말없이 행동으로 화를 냈다.    

 



그 당시 남편은 나를 믿지 못했다. 결혼 초부터 시댁 문제로 사이도 좋지 않았던 남편은 트집을 잡고 싶었던 것일까? 이때만 해도 남편이 전부였던 나는 믿어주지 않는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혼자 마음 아파하고 괴로워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그 시절 남편의 오해와 나의 억울함 속에서 살아왔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시간들이 쌓였고, 그 갈등은 지금까지도 우리의 관계 속에 남아있다.


이제는 서로에 대한 기대보다는 모든 걸 포기하고 아이들 아빠로만의 역할에만 충실하게 살아 주기 바란다. 내가 나가서 남자를 만나도 남편이 나가서 여자를 만나도 우리 가정만 깨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더 크다.     



나는 가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가 가장 이쁘고 젊었을 때, 선택한 사람이 남편이다. 그렇다면 이게 나의 눈높이다. 이제는 나도 늙고 병들었다. 게다가 자식도 2명이나 있다. 새로운 인연을 만나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내복이 여기까지인데 뭘 더 바라겠는가? 멋지고 돈 많은 이성이 만날 때마다 모든 걸 다해주고 말 상대가 된다면 몰라도. 또 그런 사람이 뭐가 아쉬워 나를 선택하겠는가? 있어도 사양하고 싶다.     




이제는 남편이 아닌 내 멋진 아들과 이쁜 딸이 내 곁에서 힘이 되어주기를 바란다. 그들이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동반자임을 깨달은 지금, 병실에서 “골수암”이라는 심각한 나의 상황을 두고 생각에 잠긴다.     

2024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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