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뜬금없는 이야기이지만, 나는 천주교 신자이다. 모태신앙이고, 지금껏 쭉 성당을 다녀서 교리나 성경을 완전히 알지는 못하지만 공기처럼 물처럼 내 안에 스며있고 함께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를 낳고 기르고 가르치며 문득문득 다가오는 성경 구절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린 일이 많이 있다. 그중에 나를 가장 절절하게 만든 부분은 바로 이 구절이다.
저는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저도 이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요약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내 보내시며 아버지 하느님께, 저를 축복하신 것처럼 이들도 축복해 주시라고 기도하시는 장면이다. 나를 사랑해 주신 것처럼 이들도 사랑해 주십시오, 내가 경험한 사랑을 이들도 알게 해 주십시오. 하는 마음, 사랑하는 제자들이 세상에 나가서 겪게 될 시련을 미리 아시고 아프지만 축복하여 내보내는 마음을 읽으며 내 아이들을 유치원에, 학교에, 세상에 내 보내는 내 마음도 이렇지 않을까 생각했다면 너무나 큰 불경일까, 감히 나의 마음을 어디에 비교해? 하지만 큰 아이가 처음 셔틀을 타고 유치원에 가던 날, 커다란 가방을 메고 혼자 학교 교문을 넘어가던 날 눈은 웃지만 마음으로 울며 이 구절을 떠올렸다. 오 주님, 부디 저 아이를 지켜주십시오.
아이들을 가르치는 궁극의 목적 역시 세상에 내 보내기 위함이다. 내가 경험했던 세상으로, 혹은 그것 보다 더 좋고 넓은 세상으로 내보내고 싶은 마음, 그 마음으로 부모는 기꺼이 돈을 지불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채찍질하며 공부시킨다. 세상에서 뭘 하라고? 그 넓은 세상과, 많은 사람과 함께 살으라고. (엄마 그만 찾고!)
이렇게 세상과의 소통을 위해 인터넷, 스마트폰, 각종 기기들이 발달을 하고 소통을 위한 책도 쏟아져 나오고 영어로도 소통하고 살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영어공부에 열심히지만 우리는 어쩌면 소통의 부재의 시대에 살고 있다. 글씨는 읽으나 글을 이해하지 못하는 문해력 결핍, 영어 단어를 몇 십 개씩 외우며 시험을 보지만 필요 한 때에 써먹지 못하고 속으로 삼키는 자신감 결여, 아이들은 그렇게 소통하는 방법을 몰라 학원을 다니고, 센터도 다니고 필요하면 병원도 다닌다.
육아의 교육의 최종 목적 또한 독립이다. 스스로 서는 것. 그게 넓고 좋은 세상이든 좁고 어쩌면 불공정한 세상이든 아이들은 조만간에 내 품을 떠나 세상에서 홀로 살아야 하고, 나는 그것을 돕기 위해 가정에서는 엄마라는 이름으로, 학원에서는 선생님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한다.
대여섯 살 어린아이들이 영어 유치부부터 "달리는" 이유도 남들보다 더 잘 영어로 소통하기 위해서인데 어쩐 일인지 발음이 더 좋고, 알고 있는 영단어의 양은 더 많을지 몰라도 소통능력, 공감능력이 더 좋다고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남들보다 더 높은 레벨에 있기 위해, 진단평가에서 더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 하는 언어공부는 언어의 본래의 기능인 소통에 목적이 있다기보다, 언제 휴지조각이 될지 모를 성적표 한 장에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많다. 안타까운 건 아이들의 소중한 시간, 맑은 웃음, 그리고 부모의 돈, 모든 것이 그렇다.
아이들을 세상으로 내보내는 큰 그림 안에서 오늘, 내일 받는 영어 학원의 성적표 한 장이 큰 의미가 있을까? 소위 말하는 영어 4대 영역의 밸런스를 맞추는 것보다 아이가 험한 세상에서 올곳이 서 있을 만큼의 내면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 더 신경 써야 할 것이 부모의, 선생님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도 전화를 한 통 받는다. 곧 있을 학기 말 시험에서 (학원의 학기) 어떻게 공부해야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는지 문의하는 전화이다. 책의 전반적인 부분에 걸쳐서 문제가 출제되기 때문에 굳이 시험범위를 말하자면 아이의 가방에 들어있는 책 7권 전부이고, 이런 시험은 시험을 앞두고 벼락치기로 공부하기보다는 평소 실력으로 보는 거라 평소에 숙제를 잘하고 수업을 잘 들었으면 무난하게 치를 수 있을 거라고 말씀드린다. 하지만 더 좋은 점수, 옆 친구보다 더 높은 점수를 원하는 부모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조금 씁쓸한 기억이다.
어머니, 지금 이 시험, 우리 00이 인생에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그렇게 에너지 쓰실 것 없어요.라는 말은 그냥 속으로 삼킨다.
영어로 소통하는 능력은 어떻게 길러지는지 물어보신다면, 아이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사람,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사람이 되는 것이 첫 번째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생각이 꽉 차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영어라는 도구가 조금 서툴더라도 아이는 영어로 말할 것이다. 아이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사람으로 성장한다면 언어라는 장애물을 뛰어 넘어서라도 소통을 원하는 손길을 받을 것이다. 그러면 그때, 서툴더라도 영어를 쓰면 되고 설령 영어가 조금 서툴더라도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하다면 상대방은 감동을 받고 매력을 느낄 것이다. 언어로서의 영어능력은 이렇게 길러진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아직 초등학교 저학년인 우리 아이는 왜 영어 학원으로 밀어 넣었느냐 하는 질문에는 공부하는 맷집을 기르기 위해서라고 대답하고 싶다. 우리 아이는 형님들 틈에 섞여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속도도 조금 빠르고, 외워야 하는 단어도 또래에 비해서는 조금 많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참고 해내고, 때로는 시험을 못 보고, 선생님과 급우들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우리 아이만을 위해 속도를 늦출 수는 없으니) 쓰기를 다 못 해 오더라도 괜찮은 경험을, 맷집을 키워주는 중이다. 성공한 경험, 실패한 경험 모두를 골고루 해 보며 아이는 공부하는 법을 어쩌면 스스로 찾을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이상, 공부는 어쩔 수 없이 꽤나 중요하고도 큰 부분이기에 그냥 이렇게 아이를 키우기로 결정하였다.
엄마는 영어 유치부에서, 영어 학원에서 정말 다양한 아이들과 만나면서도 우리 아이를 보면서는 굳이 잘하는 친구만을 꼽아 비교를 하게 된다. 그럴 때면 조급한 마음이 슬쩍 올라오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궁극의 목적을 언제나 잊지 않으려고 한다. 내가 이 아이를 가르치는, 영어를 배우게 하는 목적은 세상에 내보내기 위함이고, 그것을 이루는데 지금 이 순간은 큰 문제가 아니라고 스스로 내려놓으면서 말이다.
사교육의 한가운데에서 아이들의 학습과 생활을 돕는 일을 하고 있지만, 우리 아이는 스스로 단단해졌으면 하는 마음이 크다. 우리 아이뿐만 아니라 모든 아이들이 잘 소통하는 아이로, 건강한 맷집을 길러 쉽게 쓰러지지 않는 아이로 자랐으면 좋겠다.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을 달달 볶을 것이 아니고, 스스로를, 세상을 달달 볶아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을 좋게 만들면 그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