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기, 초등기의 영어 조기교육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마 영어 노출일 것이다. 영어 환경에 아이를 노출시키는 것, 영어 영상을 틀어주고, 영어 노래를 들려주고, 영어 원서를 읽게 하는 등 영어를 쓰는 환경에 아이들을 자연스럽게 노출시켜 아이가 자연스럽고 수월하게 영어를 습득하도록 돕는 것이 아마 핵심이자, 학원과 학부모님들의 목표 아닐까.
영어 유치부부터 영어를 꾸준히 공부하는 친구들은 한국어를 거의 쓰지 않고도 영어의 독해력이 올라가는 것을 실제로 볼 수 있다. 모르는 단어도 영영 풀이로 해설을 보게 하는데 단어를 하나하나 한국어로 찾아 각주처럼 달아가며 해석을 했던 나로서는 정말 신기한 광경이지만 요즘에는 흔히 접하는 일이 되었다. 이를테면 포함하다, contain이라는 는 안에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to have something inside로 풀이해서 익히는 것인데 이렇게 한국어 각주 하나 없이 영어실력을 늘려가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다. 그렇게 차곡히 실력을 쌓아가다 보면 우리가 책을 읽으며 모르는 단어가 나와도 대충 유추해서 뜻을 알게 되듯이 그 정도 수준에 이르기도 하는데 정말 아이들의 스펀지와 같은 학습 능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런 아이들은 영어책을 주로 읽는다. 학원에서 빌려가게 하기도 하고, 집에서 부모님께서 구입해 주시는 영어 원서 전집 세트라든지, 미국 교과서를 그대로 갖다 수업에 활용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영어책을 자연스럽게 접한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시간은 한정적이라 그렇게 영어 독서에 몰입하는 동안 아이들의 한국어 어휘나 능력이 떨어지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유치원 시절 2-3년 정도 지내고 들어와 초등 저학년부터 우리 학원에 다니는 아이가 있는데 영어를 기가 막히게 잘한다. 어린 시절 미국에서 지낸 경험으로 발음이 원어민 수준으로 좋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꾸준히 영어를 학원에서 집에서 공부한 덕에 중2인데 수능 모의고사를 봐도 틀리는 것이 없을 정도라 입시나 내신에서 아무 걱정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웬걸, 아이는 영어 빼고 모든 과목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었다. 이유는 어휘, 부족한 한국어 독서량 때문이었다. 영어지문은 고등학교 이상의 수준도 영어로 이해하고, 영어로 해설을 볼 정도이지만 그 외의 과목들에서 다루어지는 어휘들은 초등 수준에 머물러있다 보니 국어과목과 사회, 과학 전반이 너무 어렵다고 호소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영어 과목도 내신 시험을 치르게 되다 보니 한국어 단어 해석이 부족하여 틀리는 경우가 종종 있어 답답해했다. 미국에서 오래 살은 것도 아닌데, 한국에 와서는 한국어 학습, 독서에 더 신경 쓰면 어땠을까 스스로도 부모님께서도 안타까워하시는 순간이었다. <국어가 그렇게 어려워?> 하며 아이의 가방에서 국어 학습지와 문제집을 보니 어렵긴 어려웠다. 중학교 국어가 이렇게 어려웠나? 형태소 쪼개는 게 너무 어렵다고 투덜대는 아이에게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다른 한 친구는 영어 유치원을 다니고 있는데 엄마가 영어 유치원은 보내시지만 학습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아서 1년정도 후에는 영어 유치부의 학습량을 따라가기에 조금 벅찬 지경에 이르렀다. 이미 다른 아이들은 단모음, 장모음을 너머 이중자음, 이중모음까지 진도가 쭉쭉 나가는데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다, 때로는 아이에게 굉장한 스트레스이고 못 하는 것, 안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이 친구는 이제 알파벳을 쓰기 시작한 터라 이미 유치원에서 시행하기 시작하는 단어테스트를 따라가기 힘들어졌다. 영어 유치부를 이제 와서 그만둘 수는 없으니 엄마와 아이는 부랴부랴 영어 파닉스 연습에 들어가느라 한글 학습시기를 놓쳐버리게 된 것이다. 취학 전까지 한글을 대충 떼긴 하였는데 학교에 가서도 초등부에 연계되는 영어 학습을 따라가느라 받아쓰기나 한글책 읽을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였고, 그렇다고 영어 원서를 자연스럽게 읽을 만큼 성장하지도 못한 경우라 이래 저래 학습에 난항이 예고되는 안타까운 경우도 있었다.
나는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했다. 니하오도 모르고 들어간 대학교에서 나름 고군분투하며 졸업즈음엔 남부럽지 않은 중국어 성적을 내보이며 졸업에 성공했지만 그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다. 중국에서 오래 살아서 중국어 특기자로 입학한 친구들, 한국에 살았지만 화교여서 외국인 전형으로 들어온 친구들을 볼 때마다 기가 죽었는데 학교 생활을 조금 해 보니 그 친구들이 수업 과제를 하는 것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유는 중국어로도, 한국어로도 신문이나 긴 호흡의 책을 읽을 문해력이 없어서였다. 중국에 있을 때는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긴 중국어 글을 읽는 것을 피했고, 한국에서는 중국에 살아서 서툴다는 이유로 한국어 글을 읽지 않았는데 그러다 보니 어휘나 문장력, 문해력이 그리 높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대학 과제를 써내는 것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고 겉으로 보이는 발음이나 회화 실력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던 경험이 있다.
영어학원에서 아이들을 보며, 미국 학생 수준으로 영어 실력을 올리려고 고군분투하는 아이들과 학부모님을 볼 때 그런 생각이 든다. 영어든, 한국어든 긴 호흡의 글, 수준 높은 글을 읽어 낼 수 있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하는데 초등학교 다니는 황금기에 미국 초등학생 실력의 영어 수준을 갖추려 한국어의 내실을 다질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물론 영어로, 혹은 영어와 한국어 이중언어로 높은 수준의 글을 읽고 쓸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는 경우도 많이 있지만 영어 공부에 치우치다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놓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정작 제대로 공부해야 할 중고등 시기에 다른 것도 아니고 한국어 어휘 때문에 교과서 학습조차 어려워진다면 우리 아이의 영어공부는 제대로 된 것이 맞을까.
영어 학원에 보내기 시작하면 당장 따라가야 하는 진도, 단어시험, 숙제에 독서 시간을 확보하기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당장 우리 큰 아이만 해도 매주 2회만 가는 학원인데 (엄마가 일하는 학원) 주 2회 숙제를 하는 것을 매우 귀찮아하고, 힘들어할 때가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글을 쓰는 내 마음도 웃긴 것이 열개 외우는 단어 시험 양이 너무 적은 것은 아닌가 한다는 것이다. 열다섯 개, 스무 개 정도까지 늘려도 되지 않을까 하는 엄마 욕심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럴 때마다 영어점수 몇 점과 평생 쓸 한국어능력을 바꾸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욕심을 누르고 한국어 독서를 권한다. 집집이 그러하겠지만 아들 녀석은 영어 공부를 안 해도 한국어 독서에는 크게 관심이 없으니 이러느니 영단어를 외우게 하지!! 하는 마음도 차분히 눌러본다. 초등은 초등답게, 조금 놀아도 된다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엄마 마음과 선생님 마음이 이렇게나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