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아이를 바라본다. 다른 집과 절대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내 기준으로 우리 집엔 책이 많다. 내 책도 꽤 되고, 아이들을 위한 책도 구석구석에 차곡차곡 혹은 널브러져 그득히 있다. 어디까지나 내 기준이다.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에 나오는 거실 전체가 책장이고 서재가 따로 있고, 그 정도로 도서관 같이 정돈된 책장을 가지고 있지는 않으니.
손석희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김이나 작사가가 나온 부분을 유튜브로 보았다. 나의 첫 책이라는 주제로 대담을 나누는 부분이었는데 김이나 작사가의 원픽은 요술분필이라는, 지금은 절판된 외국 그림책이었고 손석희 아나운서의 원픽은, 책 이라기보다 한 단어였는데 전국 방방 곡곡이라고 했다. 뜻도 모를 만큼 어릴 때였는데 전국방방곡곡 이란 말이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며 웃으셨다. 어릴 적 애정했던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을 좋아하는데 어쩌면 그 책들은 그 사람을 일정 부분 표현하고 있기에 책과 사람의 닮은 부분을 찾아보고 상상해 보는 재미가 쏠쏠해서 일지도 모르겠다. 우리 시대의 저널리스트 손석희와 전국 방방곡곡은 너무나도 닮았다. 전국 방방곡곡에 그의 음성이 전해지고, 전국 방방곡곡의 소식이 그의 머리와 입을 통해 전달된다. 요술분필이라는 책도 김이나 작사가와 닮았다. 책의 내용은 알 수가 없지만 그녀의 손 끝에서 나오는 조용필, 아이유, 아이브, 이선희의 노랫말들은 어쩌면 요술 분필을 통해서 나오는 걸지도 모르겠다.
계몽사에서 복간판이 나왔을때 구매하였다.
그러면서 나의 첫 책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나의 첫 책은 모르겠고 디즈니 전집이 나의 첫 책들이다. 그중에 길을 잃은 미니공주가 미키 왕자의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게 되었는데 공주의 신분을 의심한 미키의 엄마가 작은 완두콩을 하나 놓고 그 위로 이불을 스무 장을 깔아 준 뒤 그 잠자리에서 잠을 잘 자나, 못 자나 시험해 보는 내용이 제일 인상 깊게 남았다. 아마 침대에 대한 동경이었을 것 같다. 나는 한 장 깔고 자는 요를 스무 장이나 깔아 주다니, 그런데도 그 콩 한쪽이 불편하여 잠을 설친 공주와 침대라는 경험 해 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 그것에 매료된 어린 시절이었다. 그리고는 초록색 세계동화전집이 있었는데 내 몫의 책이긴 했지만 언니들이 보다가 물려준 책이었다. 그것이 유년의 책에 대한 기억, 그리고는 초등학생 시절엔 이렇다 할 책에 대한 기억이 없다.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언니들의 책은 많이 있었지만 국민학교 다니는 내 몫의 동화책이 없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인가, 반갑다 논리야, 논리야 놀자, 고맙다 논리야 시리즈가 전국을 강타하며 우리 집에도 들어왔는데 그 책들을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논리 부분은 어려웠겠지만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이야기들은 너무나 재미있었다. 그리고는 선물 받은 "꿈이 흐르는 강"이라는 어린이 성장 동화책이 있었는데 그 책을 닳고 닳도록 읽었던 기억이 있다. 내 또래의 여자 아이가 주인공인 이야기였고 내용 중에 돈가스를 먹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장면을 읽으며 돈가스가 너무나도 먹고 싶었던 나머지 집에서 돈가스를 먹는 날에는 꼭 그 책을 펴 놓고 읽으면서 먹었다. 이제는 알라딘에서 절판도서로 흔적만 남은 그 책이 사춘기 전에 만난 내 기억 속의 마지막 동화책인 것 같다.
사춘기 이후로는 오히려 읽을 책이 많았다. 머리가 커지니 집에 있던 언니들의 책이 다 내 책인 것 마냥 읽을 수 있어졌는데 은희경, 박완서, 조정래, 황석영 작가의 책들을 일찌감치 만나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자 행복이었다. 세계문학전집도 많이 있었지만 나는 한국문학이 더 좋았다.
책에 대한 기억은 어떤 책을 닳도록 읽었던 그 기억에 대한 추억이기도 하다. 어떤 책을 닳도록 읽었다는 것은 나의 무언가가 그 어떤 책과 비슷하거나 닮았다는 이야기인데 닳도록 잃으며 나를 닦고 보살피고 비추고 알아가는 과정, 그런 성장의 과정에서 책은 꼭 많을 필요가 없이 한 두 권이면 충분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더 많은 책에 대한 갈망, 약간의 결핍이 조금 더 단단하고 반짝이는 독서의 기억을 만들지는 않을까,
응답하라에 나와서 반가웠던 책, 지금 우리집에는 개정판이 세트로 있다.
우리 아이들은 책을 읽는데 항상 새 책을 읽는다. 읽었던 책을 또 읽을 필요가 없을 만큼 좋아하는 책들의 신간이 자주 나오고, 어린이를 위한 책이 많이 나오고, 내가 사 주지 않아도 책을 빌려볼 수 있는 도서관이 지척에 있으니 꼭 집에 있는 책만 닳도록 볼 이유가 없다. 주로 학습만화를 좋아하지만 가끔씩은 줄글 동화책을 강요하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안 읽어본 새 책으로 강요해야 하는 것이 여간 불편스러운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읽었던 책은 두 번을 안 보려고 하는데 또 한번 읽어보라고 들이밀때도 있다. 아이들은 언제나 새 책을 읽고싶어한다. 새 이야기들이 지천에 널려있으니 헌 이야기들에는 손이 잘 안가는 모양이다. 아이들의 흥미를 끌만한 제목을 골라 이 책을 읽어보라고 좋은 말로 권하다가, 줄글 동화책을 안 읽으면 만화책을 볼 수 없다고 협박조로 이야기해야 할 때도 있다. 만화책이라도 책을 보는 게 어디냐 싶지만 기왕이면 동화책이었으면 좋겠는 것은 엄마의 욕심일까, 이 아이들의 첫 책은, 원픽은 과연 무엇이 될까 생각하며 그것이 그냥 단편적인 지식을 전달하려 짧디 짧은 구어체와 감탄사로 이루어진 학습만화가 될 것을 생각하면 한탄스러운 것이 나도 그냥 꼰대인 모양이다.
나의 첫 책에 대한 대담을 보다가 나의 책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요즘엔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를 다시 읽었고, 나목을 다시 읽고 있는 중인데 이렇게 읽었던 책을 또 읽는 재미가 얼마나 좋은지 일 평생 새 책은 안 사고 읽었던 책만 다시 읽어도 충분하겠다 생각하면서도 알라딘 앱을 켜서 책 구경을 하고 있는 내가 얼마나 우스운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