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을 준비하는 고3 수험생 때 또는 학생 시절 어른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좋을 때다"라는 표현이다. 어린 시절 나는 그 말에 단 한 번도 공감해 본 적이 없다. 오히려 늘 반발심이 들었다. "아니, 나는 지금 공부만 하느라 괴로워 죽겠는데 좋을 때라니? 이게 무슨 말이야 정말..!!" 이렇게 생각하면서 말이다.
지금의 나도 어린 나이이지만, 직장을 갖고 3년 차가 된 20대 후반의 나는 이제야 조금은 그 말이 이해가 될 것도 같다. 내가 흥미를 붙일 수 있고, 열정을 가질 수 있는 분야의 안정적인 직장을 갖게 되기 바로 이전까지만 해도, 나의 삶은 치열한 고민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수험생 때 하던 고민과는 완전히 다른 불투명한 나의 미래에 대한 암담함에서 오는 고민이다. "내가 뭘 좋아하지?"부터 시작해서 "뭐 먹고살지?"까지 이르는 수없이 많은 질문을 나에게 던지고 그 해답을 찾아야만 했다. 그런데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는 점은, 국적, 성별 할 것 없이 누구나 인생의 이십 대의 시기에는 그러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프렌즈의 주인공들은 시즌1에서 나이가 모두 이십 대이다. 무려 10년 동안 시즌10까지 에피소드가 계속된 만큼 청년들이 살아가는 여정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시행착오들을 보여주고 때때론 그에 대한 해답 또한 제시해 주는 듯해서 내가 더욱 프렌즈 덕후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특히 이번에 이야기할 에피소드는 시즌1의 초반에 나온 내용으로 유명한 명대사 "I don't even have a pla", 한국말로 번역하면 "계획의 ㄱ자도 없어"를 탄생시킨 에피소드이다.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여유 있게 자랐지만, 별 능력이 없는 레이첼은 치과의사에게 '취집'을 하려다가, 자신이 그 치과의사인 예비남편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결혼식 당일날 도망쳤다. 이로 인해 화가 난 레이첼의 부모님은 레이첼이 다시 정신을 차리고 집으로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에서 과감히 레이첼을 향한 금전적 지원을 모두 끊어버린다. 그럼에도 레이첼은 굳건히 카페에서 알바를 하며 진정으로 부모님으로부터의 '독립'을 이룬다.
그러던 어느 날, 레이첼의 친구들이 그녀를 찾아왔고, 친구들과 함께 근황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한 친구는 임신을 했고, 다른 친구는 약혼을 했고, 또 다른 친구는 승진을 했단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 카페에서 알바나 하고 있다니. 갑자기 앞날이 캄캄해짐을 느낀 레이첼은 피비와 모니카에게 고민을 털어놓는다.
처음에는 모니카와 피비가 "시간이 지나면 점점 모든 게 명확해질 거야. 마치 마법의 콩을 심어 열심히 기다린 결과 하늘까지 뻗은 콩나무를 얻게 된 잭과 콩나무처럼 말이야"라고 응원한다. 그러자 레이첼은 말한다.
"만약 우리가 심은 콩이 마법의 콩이 아니라, 그냥 콩이면 어떡해?" 이 말을 들은 모니카와 피비도 말을 잃고 우울감에 빠져버린다. 해당 장면은 너무나 중요하니 대사를 간단하게 옮겨보도록 하겠다.
Monica : 자신감을 가져 레이첼, 너는 멋지게 독립이라는 걸 한 거잖아!
Rachel : 뭐가 멋져 이게, 난 치과의사랑 결혼하는 걸 포기했어.
Pheobe : 너는 잭과 콩나무의 잭인거야, 뭔가를 포기하는 대신 마법의 콩을 얻었잖아. 다음 날 일어나니까 엄청나게 큰 식물이 있었지!
Rachel : 잭은 소를 포기했고 나는 치과의사를 포기했지. 물론 그 남자를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그땐 적어도 모든 게 분명했다고. 그런데 지금은 내 미래가 마치 뿌연 안개 같아.
Monica : 너만 그런 거 아니야! 우리도 지금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 건지 모르는걸?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게 분명해질 거야..!
Rachel : 그런데 모니카, 모든 게 분명해지지 않으면 어떡해? 우리가 심은 게 마법의 콩이 아니라, 그냥 콩이라면?
Monica & Pheobe : .......
(모두가 우울감에 빠져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Monica : 피비 넌 혹시 계획이 있니?
Pheobe : 계획의 ㄱ자도 없어.
우리의 이십 대도 그랬다. 무엇이든 열심히는 하려고 하는데, 이게 어디로 가는 건지 뭘 위한 건지 몰라서 괴롭다. 레이첼이 '내가 심은 콩이 마법의 콩이 아니면 어떡하지?' 하는 고민을 나눌 때, 마치 나에게 이야기하는 듯했다. 다행히도 나는 이 뿌연 안개처럼 불투명한 미래로 인해 괴로운 마음이 들 때, 마음을 다잡고 헤쳐나가는 법을 프렌즈를 통해서 배울 수가 있었다.
아까 상황에 이어서, 우울감에 빠져있던 레이첼과 피비, 모니카는 그래도 여느 때처럼 피자를 주문했다. 그런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피자까지 잘못 배달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불만에 짜증까지 폭발해 버리기 일보 직전의 순간에, 그 피자가 원래는 앞집의 아주 귀엽고 잘생긴 남자에게로 배달되었어야 할 피자라는 걸 알게 되고 왠지 모르게 다들 신나 버린다. '내가 그 잘생긴 남자의 피자를 받게 되다니!!' 하고 말이다. 너무 단순해서 우습기도 한 그런 상황이지만, 세 친구는 미래의 불투명함은 뒷전이고 일단 잘생긴 남자의 피자를 받았다는 것 만으로 행복해진다. 그렇게 레이첼은 현재 내가 지금 이 친구들과 함께하고 있고, 행복하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 '그래, 나는 정말 괜찮아' 하고 되뇌며 이야기가 끝이 난다.
프렌즈의 모든 10개의 시즌을 다 지켜본 내가 감히 스포일러를 하자면, 6명의 주인공들 모두 시즌 막바지로 갈수록 저마다 안정감을 찾고 불투명한 미래를 점차 투명하게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갔다는 것이다. 미래를 위해 늘 고민하고 노력하지 않고서는 세상이 말하는 '성공'을 이루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에 성공하기 위해서만 태어난 것은 아닌 것 같다. 레이첼처럼 현재의 행복을 즐기고, 나를 아끼며 살아가다 보면 적어도 나만이 일궈낼 수 있는 소중하고 나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것 또한 우리는 성공한 인생이라고 부르기에 마땅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