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바르 산책
이른 아침, 해가 뜸과 동시에 흐바르 마을, 골목 탐방에 나선다. 딱히 특별한 것이 없는 섬이지만 하려고 마음먹으면 끝이 없다. 베네치아 요새에 올라 흐바르 도심의 그림 같은 풍경도 담아야 하고 항구 앞 레스토랑에 앉아 해산물 요리도 맛보아야 한다. 골목골목 자리한 관광 명소도 찾아가야 하고, 라벤더 향도...
스테판 광장 근처의 가파른 계단 길을 따라 16세기 지어진 베네치아 요새(Tvrdava Spanjola)로 향하는 입구에 도착. 30분 남짓 언덕길을 따라 올랐다. 이윽고 도착한 요새 앞, 파리 한 마리 구경할 수 없다. 불길한 예감으로 수차례 문을 두드려 보았지만 굳게 닫힌 철문은 열릴 낌새는 보이지 않는다. 얼마나 지났을까. 필요한 물품을 싣고 올라온 요새 관리인을 만났다. 굳게 닫혔던 문은 열렸으나 입장은 허락되지 않았다.
“비수기에는 문을 열지 않습니다.” 짧고 굵은 관리인의 한 마디.
"여기까지 오기 위해 비행기와 버스, 배까지 타고 왔습니다."
"부탁드립니다." 궁색한 이유를 늘어놓는다.
"좋습니다. 하지만 단 한 시간입니다."
그렇게 한 시간가량의 입장이 허락됐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 마냥, 요새의 이곳저곳을 뛰어다닌다. 대포를 쓰다듬는가 싶다가 요새에 탑에 오르기도 하고, 짧은 시간 모든 풍경을 담기 위한 카메라는 멈출 줄 몰랐다.
요새에서 바라보는 풍경이란. 스테판 대성당과 광장, 아드리아 해에 둥실둥실 떠 있는 보트와 요트들, 드넓은 지중해의 풍광, 붉은 석조 주택들의 지붕, 아기자기한 골목과 전통 주택들의 모습들 정도지만 눈으로 보는 것 이상을 느낄 수 있다.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기분. 살아있는 듯한 이 기분. 흐바르 섬에서 시간을 만끽한다. 이렇게 또 하루가 지나간다. 시내 구경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항구에 나가 내일 떠날 배편을 알아보니, 짓궂은 날씨 때문에 배가 뜨질 않는다고 한다. 서둘러 하루 더 묶을 숙소를 잡고 차가워진 몸을 녹이러 스테판 광장 근처 카페를 찾는다. 운치 있는 분위기와 따뜻한 벽난로에서 나오는 장작의 힘이 온몸을 노곤하게, 기분 좋게 만든다. 옆 테이블에 자리한 노신사는 중절모에 낡은 만년필을 들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카푸치노와 장작불, 조금은 이른듯한 크리스마스 캐럴. 비수기, 겨울, 사람은 없지만 따뜻함이 있다. 흐바르 지역은 섬에서 가장 번화한 곳으로 카페와 호텔 등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여름에는 해변에서 일광욕을 즐기거나 크루즈를 즐기는 것이 다반사지만 겨울은 생각보다 을씨년스럽다. 비수기 여행자들은 베네치아 요새, 교회, 박물관 등이 역사적 명소들을, 아니 문 연 곳을 찾아 둘러보는 정도다. 흐바르 타운은 인기 휴양지답게 장기간 체류를 하는 여행자들을 위한 스튜디오 타입의 숙소가 많고 가격도 다른 유럽에 비해 상당히 저렴해 보통은 몇 주씩 머물다 간다. 나 역시 비교적 싼 가격에 숙소를 구했다. 1박에 약 100쿠나 정도. 스테판 광장 중턱에 있던 아파트를 떠나 광장 중심의 숙소로 이동했다. 트렁크를 끌고 올라가는 것도 힘들었지만 내려오는 일도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 덜커덩 거리는 트렁크 바퀴 소리가 조용한 거리에 울려 퍼지는 무례함을 이겨내며 숙소 앞에 도착했다.
인터넷을 이용해 예약을 한지라 숙소는 언제나 반신반의. 비수기라 그런지 숙소의 문은 언제나 굳게 잠겨있다. 문 앞에 붙여진 미션 메시지를 하나씩 해결하자, 멀지 않은 집에서 집주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나타난다. 그리고는 누군가와 심각한 통화를 하기 시작. 크로아티아어라 이해하기는 힘들었지만 뭔가 일이 났다는 것은 바보가 아니라면 충분히 알 수 있는 상황.
잠시 후, 그는 말을 이어나갔다.
“정말 미안합니다. 계획대로라면 공사가 마무리되었어야 하는데요, 며칠 비가 많이 내린 관계로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어요. 저는 집수리를 하는 사람이고 이곳 주인은 현재 유럽에 있어요. 성수기를 대비해 아파트를 수리하려고 한 건데...
일단 올라오시지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자르다 만 나무토막과 정리되지 않는 전기배선들이 널 부러져 있다. 한 마디로 엉망진창, 이런 곳에서는 단 한 시간도 보낼 수 없다는 것을 서로가 인지했다. 몇 차례 전화를 통해 해결책을 제시했다. 자신의 친구가 운영하는 숙소를 소개해줄 테니, 그곳에서 지내라는 것. 흔쾌히 그러기로 하고 친구를 기다렸다. 잠시 후 나타난 친구는 바로 내가 흐바르 섬으로 들어올 때 페리에서 만났던 오지라퍼, 바로 그 현지인이다. 웃지 못할 해프닝으로 흐바르 섬의 여행은 계속됐다.
여행지에서의 하루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다. 오전에는 비가 잦아들기 기다리며 숙소에서 지내고 오후 무렵 시내로 나와 거리를 둘러보는 것이 보통이다. 오후 4시면 마을은 빠르게 어두워진다. 저녁은 인근 레스토랑에서 먹거나 숙소에서 직접 해 먹는다. 기상 악화로 예정보다 이틀간의 일정이 더 늘어났다. 다음 일정을 위해서라도 흐바르 섬을 떠나야만 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또다시 시작된 하루, 오전에 출항 예정이던 카타마란 페리가 다시 취소. 날씨가 좋지 않은 까닭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항구의 구조 때문이란다. 카타마란이 계류하기에는 어항 시설이 너무 작아서 자칫 계류를 시도하다 사고가 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 수 없이 다시 집으로 돌아와 잠을 청하고 오후에 스타리 그리드로 이동, 카 페리(Car Ferry)를 타기로 했다. 다행히 스타리 그리드에서 스플릿까지 운행하는 카 페리의 경우, 요금은 카타마란보다는 약간 비싼 편이지만 배가 훨씬 크서 취소가 거의 없다고 한다. 단, 스플릿까지 소요시간이 2시간으로 오래 걸린다는 점과 흐바르 마을에서 스타리 그리드까지 이동하는 버스의 스케줄이 매주 바뀌기 때문에 미리미리 확인을 해두어야 한다는 정도. 택시나 미니밴을 이용해 갈 수도 있지만 비싼 요금을 감수해야 한다.
버스 정류소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버스를 기다린다. 카 페리를 이용하는 승객들의 풍경 역시 카타마란 페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운항 시간이 길어 잠을 청하거나 텔레비전을 시청하며 시간을 보낸다. 오후 5:30분에 출항한 카 페리가 스플릿에 도착한 시각은 저녁 7:30분이 조금 넘어서다. 출출한 배를 채우기 위해 스플릿 리바 거리의 작은 레스토랑에 들러 신선한 해산물이 가득 들어간 스파게티와 맥주를 시키고 다음 목적지인 두브로브니크행 버스의 첫 번째 차 시간을 확인한다. 무거운 트렁크를 끌며 섬을 오르락거린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던 흐바르. 비수기라 볼 것이 없었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던 흐바르.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다시 본 흐바르의 사진은 그때와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꾸만 떠오르는 따뜻한 장작불의 노곤함... 지금 이 순간에도 스플릿 항구 주변에는 흐바르 섬으로 향하는 페리와 요트, 택시 보트가 쉴 새 없이 항을 오가겠지! 행여 눈치채지 못했다면, 둘러보시라. 오랫동안 후회하는 마음으로 스플릿을 기억하기 싫다면, 지금 당장 흐바르행 페리에 몸을 실어 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