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회인 Jul 26. 2023

이발소에서 맡은 아버지 향기

  엄마 심부름으로 시골장날에 아버지를 찾으러 이발소에 갔다. 이발소는 버스정류장이 있는 로터리 근처의 허름한 건물에 있었다.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갔다. 보자기를 두른 채 커다란 의자를 뒤로 젖히고 뒤통수만 보이는 분이 분명히 아버지다. 


  다리를 약간 저는 이발소 아저씨는 늘 하얀 가운을 입고 있었다. 아저씨는 나를 한 번 쳐다보고는 아버지 얼굴에서 김이 나는 젖은 수건을 벗겨서 세면대에 던졌다. 아저씨는 때 낀 도자기 컵에 담긴 주먹만 한 솔에 비누 거품을 잔뜩 묻혀 아버지 얼굴에 여러 번 칠하는가 싶더니 면도칼을 집어 들었다. 자루가 긴 면도칼을 펴서 한 끝을 손가락 사이에 걸치고는 하얀 날을 기둥에 매달린 가죽 끈에 문질러 댔다. 이윽고 면도가 시작되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싶어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데 갑자기 아버지 코 고는 소리가 조금씩 들려오기 시작했다.  


  늘 성질이 불같던 아버지가 무서웠는데 이발소에서 만큼은 예외였다. 아버지는 이놈이 효자며 공부도 잘한다고 자랑도 하면서 느긋하게 이발을 받았다. 그때마다 뜬금없이 칭찬받는 것도 쑥스러웠고 이발이 다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은 더 큰 고역이었다. 할 일 없이 이발소 정면에 걸어놓은 액자 속 그림만 쳐다보았는데 아예 그림을 모두 외울 정도였다. 멀리 호수 너머로 산이 있고 폭포가 있는 특유의 이발소 그림이었다. 그러다 액자에 말라붙은 파리똥이 몇 개인지 까지 세다 보면 겨우 이발이 끝난다. 이발을 마친 아버지가 다가오면 특유의 냄새가 났다. 무서운 아버지한테서 처음 맡아보는 낯설고도 기분 좋은 향기였다. 


  사춘기가 지나면서 내 턱과 코밑에도 거뭇거뭇 털이 나기 시작했다. 사내가 되고 어른이 된다는 징조였다. 그때는 왜 그렇게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아버지 몰래 부엌문 앞에 걸린 거울을 보면서 처음으로 면도를 한 적이 있다. 아버지가 쓰던 면도칼은 조그맣고 한쪽으로 접어지는 것이었다. 비눗물을 묻히고 조심스럽게 턱에 댔는데도 삐져나온 털이 잘리기는커녕 따갑기만 했다. 심지어 면도날에 베여 피가 나기도 했다. 어른이 되는 것은 그렇게 쓰라렸다. 


  제대로 이발소에서 면도해 본 것은 직장에 다니면서부터다. 찜통에서 나온 두툼한 수건이 얼굴을 덮자마자 따끈한 감촉이 스며들면서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졸음이 쏟아진다. 이어 소프트아이스크림 같은 비누 거품을 면도칼이 사각거리며 걷어갈 때마다 짜릿한 긴장감과 상쾌한 전율이 퍼져온다. 새파란 면도날이 기분 좋게 양쪽 뺨을 밀고 턱밑을 깎을 때 사각거리는 면도 소리가 절정에 이른다. 이마나 눈썹 밑은 물론이고 목덜미까지 밀고 나서 마지막에는 귓불에 있는 솜털까지 말끔하게 정리한다. 


  면도를 마치면 으레 하는 일이 있다. 스킨을 손바닥에 듬뿍 받아 두 손을 딱 마주 때린 후에 얼굴을 두드린다. 순간 시원한 공기 방울이 공중에서 터지면서 아스라한 향기가 퍼진다. 아버지한테서 나던 향기였다. 평생 어렵고 무서웠던 아버지의 체취는 이발소에서 만큼은 향기로웠다. 


  나는 두 아들을 키우면서 아버지 같은 독재자가 되지 않으려고 나름 노력했다. 하지만 그놈들이 어떻게 면도를 시작했는지 모른다. 내 아버지보다는 정감 있는 아버지가 되겠다고 노력했지만 기억조차 없는 것을 보면 나도 아버지를 닮은 듯싶다. 


  지금은 이발소 대신 헤어숍에 가서 머리를 다듬으니 따로 면도할 일도 없다. 아침마다 전기면도기로 턱밑을 문지르다 보면 가끔씩 옛날 이발소가 그립다. 지난 주말에 고향에 갔다가 혹시나 해서 아버지가 생전에 다니던 그 이발소를 찾아가 봤다. 역시 없어진 지 오래다, 


  그 이발소 아저씨는 어디에서 사실까. 우리 아버지가 하시던 말씀을 기억하고 있을까.

이전 03화 살구나무 아래 그 친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