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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인 Sep 06. 2023

하나도 빠짐없이 다시 만나자

  고향 친구들과 회갑을 자축하기로 했다. 옛날 같으면 자식들이 동네잔치라도 열었지만 요즘 세상에 환갑이 어디 잔치 축에나 끼는가. 게다가 자식들이 대부분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고, 환갑 당사자 또한 아직은 출퇴근하는 실정이라 시간 맞추기도 어렵다. 그렇다고 단 한 번 맞는 환갑을 그냥 지나치기는 어쩐지 서운하다.


  친구들의 실제 회갑은 한두 해 차이가 난다. 하지만 아무도 그런 것을 따지지 않았다. 연말에 날을 잡아 통째로 자축연을 하자고 의기투합했다. 시내 복판에 있는 근사한 레스토랑을 빌렸는데 부부 동반으로 칠팔십 명 넘게 모였다. 이심전심이었을까. 아주 대성황이다. 오랜만에 보는 시골 촌놈들이라 그런지 반갑지 않은 놈이 한 명도 없다. 머리는 누구랄 것 없이 서리가 내려 희끗희끗해도 학창 시절 개구쟁이 모습은 아직도 남아있다.


  아내들이 더 신났다. 파티가 무르익을수록 남자들은 추억 속으로 가라앉는데 여자들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수다를 그칠 줄 모른다. 아마 시골 촌놈인 남편을 흉보며 스트레스를 푸는 모양이다. 한 친구가 술잔을 권하며 내 자리로 왔다. 해마다 1월 1일이 없다면 얼마나 무섭겠냐며 환갑상을 받으니 새로운 육십 년이 온 것 같아 기쁘단다. 지금까지는 무효고 새로 시작하는 인생 2막을 멋지게 열자고 한다. 버스킹 장비를 가져왔지만 아직은 초보라서 망설였던 나의 색소폰 연주를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아무리 흉허물 없는 친구들 앞이지만 초보가 많은 사람 앞에서 악기를 연주한다는 것은 떨리는 일이다. 더구나 서둘러 악기를 싣다 보니 알토색소폰 대신 새로 산 테너색소폰을 가져오고 말았다. 테너는 알토보다 커서 무겁고 소리 내는 것도 편치 않은 놈이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와인까지 서너 잔 마셨으니 반주기 화면에 뜨는 악보는 춤을 추듯 울렁거리고, 연주할 곳을 가리키는 커서는 혼자서 저만치 앞서간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진땀을 흘리며 마치 아무 일 없다는 듯 열심히 색소폰을 불었다. 다행히 반주기에서 나오는 음악에 감춰진 내 연주가 엉망이라는 걸 눈치챈 친구는 없다, 하지만 나 자신은 속일 수 없다. 내가 들어봐도 색소폰 소리는 엉망진창 막무가내다.


  술은 핑계였고 친구들은 이미 인생의 추억에 흠뻑 취해 있다. 장난기 가득한 불알친구들의 표정이 용기를 북돋았다.  두어 곡을 연주한 후에 마이크에 대고 신청곡을 받는다고 했다. 내가 어디서 그런 배짱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역시 공연은 관객이 주인공이다. 연주를 잘하고 못하고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환호성을 지르며 무대 쪽으로 몰려나온 친구들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다. 어디서 그렇게 악쓰는 목소리가 나오는지 색소폰 소리는 아예 들리지도 않는다. 그렇게 두 어 시간 놀다 보니 술이 확 깼다. 쉬지 않고 색소폰을 불어 입술이 얼얼하고 이미 내 와이셔츠는 온통 땀으로 축축했다.


  무대는 끝났다. 처음 들어왔을 때 정찬이 잘 차려진 테이블은 완전 난장판이다. 수저와 포크는 누구 것인지도 모르게 뒤엎어져 있고 접시며 술잔은 시체처럼 뻗어있다. 주고받은 꽃다발도 이미 사방에 널브러져 있다. 자기 꽃이라고 챙겨갈 사람도 없다. 참 잘 놀았다.


  마지막 앙코르곡은 어니언스가 불렀던 ‘편지’다. 이제 우리 식대로 추억의 편지라도 쓰자면서 떼창을 했다. 뒷정리하다 보니 가사가 나오던 모니터도 깨져있다. 언제 그랬는지도 모른다. 색소폰 연주가 시원찮아 모니터가 대신 사과라도 했는가 보다. 그래 화면이 깨질 정도로 잘 놀았으니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돌아오는 길에 마음으로 친구들한테 편지를 썼다. 오늘 서툰 연주 들어줘서 고맙고 소리 지르느라 애썼다. 우리 칠순 때 하나도 빠짐없이 다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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