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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인 Aug 23. 2023

나잇값이나 좀 해라

  

  모처럼 친구들 몇이 저녁을 먹고 커피숍에 갔다. 예전 같으면 식사 후 입가심한다는 핑계로 술집으로 갔을 것이다. 나이 먹은 덕일까. 이제는 카페를 찾는 것이 당연한 순서가 되었다. 이차가 없는 줄 뻔히 아는 친구 하나가 저녁을 먹으면서 소주를 양껏 마신 모양이다.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시비가 붙었다.


  전망 좋은 창가에 덥석 앉았는데 주인이 찾아와 여기는 예약 자리니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한다. 성질 급한 그 친구는 네가 몇 살인데 대드냐고 고함을 쳤다. 젊은 여사장은 나잇값이나 하라면서 쏘아붙인다. 결국 분을 참지 못하던 친구를 토닥거려 구석 자리에 앉고 보니 사방에 죄다 젊은이들뿐이다. 황망히 우리 편에 시선 주니 다들 영락없는 할배들이다. 한 친구가 아직 마음은 청춘인데 우리가 벌써 이렇게 늙었냐면서 나잇값이나 하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라고 한다.


  우리가 지금 잘 익어가는 중이라고 서로 위로하다 다른 한 친구가 오는 초파일에 절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한다. 나이 든 남자들이 모여 수다를 떨어봤자 먼 옛날 군대 얘기나 정치 얘기다. 아무 결론 없이 떠들다가 각자 헤어지기 마련인데 그날따라 아무도 토를 달지 않고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교회나 절에 갈 때마다 고민이 하나 생긴다. 교회에 가서 설교를 듣고 점심이라도 먹거나 초파일 날 절에 가서 흰무리떡이라도 한 덩이 받으면 빈손으로 오기가 민망하다. 누가 돈을 내라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뒤통수가 따갑다. 이번 초파일에 눈치를 보니 그 많은 사람이 잔치국수를 한 그릇씩 비우고 천 원짜리 한두 장씩 내는 것 같았다. 슬쩍 동행한 친구를 보니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면서 자기가 내니까 나는 굳이 내지 않아도 된단다. 내 대답은 작지만 분명했다. 에이, 나도 나잇값은 해야지.  


  우리나라만큼 나이를 따지는 나라도 없다. 처음 만난 사람끼리도 나이로 얼른 순서를 정해야 마음이 편하다. 그렇지 않으면 두고두고 찝찝하다. 세계에서 존댓말이 가장 발달한 언어가 한국어라고 한다. 한국어를 처음 배우는 외국 학생들한테 물어보면 존댓말 때문에 가장 머리가 아프다고 한다. 물론 영어나 다른 언어에도 단어의 선택이나 표현으로 존댓말과 같은 의미를 전달하고 사용할 것이다. 하지만 말에서부터 나이를 따지고 결국 나잇값이란 말까지 생겨 머리가 아픈 게 우리나라다. 그러나 나이에 따른 연륜을 존중하고 그에 맞게 처신하는 우리의 문화가 영 글러 먹은 것만은 아닐 것이다.


  주말에 아들 내외가 볼일이 있다면서 아이들을 맡겼다. 기저귀가 바짓가랑이 아래로 축 처진 채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던 손자 놈이 늦게 일어난 할미를 보자마자 “밥 좀 줘라, 제발. 모 하고 있는 거야”라며 소리를 질렀다. 순간 아기 입에서 나온 예상치 못한 말에 온 식구가 웃어 넘어지고 말았다. 말을 배우기 시작한 아기가 애비 말투를 흉내 낸 것이다. 아이가 아이답게 말해야 하는 데 나잇값은 아이들한테도 필요한 것 같다.


 전망 좋은 창가에 덥석 앉자 친히 찾아왔던 커피숍의 친절한 여사장 말이 생각난다. 내가 지금 나잇값은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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